[마을 잇다①] 동아시아 공정무역에서 공생마을 네트워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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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잇다①] 동아시아 공정무역에서 공생마을 네트워크로
농업이주노동을 매개로 한 베트남 마을과의 유기농 네트워크 : 일본 무차차 농원(1)
  • 2020.03.27 18:35
  • by 신명직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교 교수)

"어린이는 도구를 들고 일하는 대신 연필을 들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이크발 마시흐)" 

이크발 마시흐는 수제 카펫 공장의 열악한 아동노동을 현실을 고발했고, 파키스탄의 1만 명의 어린이들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하지만 처참한 생활환경은 시대와 장소를 바꾸어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존재하거나 확대되고 있다.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의 저자 구마모토가쿠엔 대학 동아시아학과 신명직 교수는 저서를 통해 네팔의 아동노동의 현실을 알렸다. 그리고 이러한 아동노동과 이주노동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대안으로 '동아시아공생문화센터'를 설립하고 공생무역을 알려왔다. 공생무역의 개념을 확장해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의 마을들을 잇는 로컬-상생과 탈국가적인(transnational) 마을에 대한 가능성을 라이프인에 공유한다. [편집자주] 


코로나 정국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호텔 숙박을 하지 않고 새벽에 출발해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을 잡고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규슈(九州) 한가운데 위치한 아소산을 횡단, 규슈 동쪽 끝 벳부(別付)에서 다시 배를 타고 1시간 넘게 해협을 건너 에히메(愛媛)현에 도착하는 왕복 12시간의 일정이었다. 캄캄한 산길과 새벽안개를 뚫고 아소산을 넘고 나니, 아침햇살이 벳부 바닷길을 따라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 왼쪽이 구마모토토 가쿠엔 대학교, 오른쪽이 에히메 현에 있는 무차차 농원. 사이에 규슈(九州)섬과 시코쿠(四国)섬 사이의 해협 ⓒ 구글어스
▲ 왼쪽이 구마모토토 가쿠엔 대학교, 오른쪽이 에히메 현에 있는 무차차 농원. 사이에 규슈(九州)섬과 시코쿠(四国)섬 사이의 해협 ⓒ 구글어스
▲ 규슈 아소산을 좌우로 횡단한 뒤 만나는 사가세키 항구 ⓒ신명직
▲ 규슈 아소산을 좌우로 횡단한 뒤 만나는 사가세키 항구 ⓒ신명직
▲ 규슈쪽 항구의 제련소 바다 건너편에 위치한 무차차 농원으로 향하는 배 위.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 ⓒ 신명직
▲ 규슈쪽 항구의 제련소 바다 건너편에 위치한 무차차 농원으로 향하는 배 위.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 ⓒ 신명직

무차차(無茶々) 감귤농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일본어로 엉망진창이라는 뜻을 가진 이 농장을 찾아 떠난 왕복 12시간의 길. 해협을 건너기 위해 올라탄 배 앞머리에 서니, 18년 전 네팔의 이크발 마시흐를 만나야 한다며 무작정 카트만두를 향해 떠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감미로웠다.      

▲ 배위의 구명정.  오이타(大分) 시 사가세키(佐賀関) 항구 이름이 분명하다. ⓒ  신명직
▲ 배위의 구명정. 오이타(大分) 시 사가세키(佐賀関) 항구 이름이 분명하다. ⓒ 신명직
▲ 규슈에서 해협을 건너오면 만나게 되는 툭 튀어나온 미사키(三崎) 바람의 언덕(風の丘) 공원의 풍차. 해협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 신명직
▲ 규슈에서 해협을 건너오면 만나게 되는 툭 튀어나온 미사키(三崎) 바람의 언덕(風の丘) 공원의 풍차. 해협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 신명직
▲ 해협을 건너와 시코쿠(四国) 섬 미사키(三崎) 항구에 도착 ⓒ 신명직
▲ 해협을 건너와 시코쿠(四国) 섬 미사키(三崎) 항구에 도착 ⓒ 신명직

동아시아의 국경을 걷어 올린 어린 전태일들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 한국은 미국과 일본 기업의 철수가 줄을 이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 임금이 급속히 오르자 저임금을 노리고 들어왔던 미국기업 피코(부천), 일본기업 스미다(경남) 등이 폐업과 집단해고를 하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다. 스미다의 미혼 여성 노동자들과 피코의 기혼 여성 노동자들이 일본과 미국으로 원정시위를 떠났던 게 엊그제 같다. 

그러던 한국이 원정시위의 대상이 된 건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국기업들은 인천항에서 가까운 중국 칭타오(靑島)와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에 그랬던 것처럼 저임금만을 겨냥한 공장 이전을 시작했고, 미국과 일본이 그랬듯이 여차하면 한국으로 야반도주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2년 전 칭타오에서 만난 김치회사 조선족 사장은 IMF가 터지자 한국기업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고 했다.

한국이 더 이상 글로벌 세계경제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왔던 나로선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무렵 10여년의 경인선 언저리 생활을 접고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대학원에 입학하던 그해 4월 신문에서 접한 파키스탄 이크발 마시흐 소년의 죽음은 나에게 벗어나기 힘든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동노동을 폭로하다 카펫 마피아들에 의해 피살된 것이었다. 전태일이 국경을 걷고 동아시아로, 동아시아의 국경을 걷고 많은 전태일들이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2년, 네팔의 이크발 마시흐를 찾아 마침내 카트만두로 떠났다. 네팔의 이크발 마시흐는 더 이상 카펫 공장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카펫 공장 대신 더 위험한 채석장에서 돌을 깨거나 밤새 폐비닐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 때 만난 12살 소년이 내게 한 물음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는 14세 미만의 아이들이 일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그럼 우리의 생활은 누가 책임집니까?" 아동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지 못한 채, 아동노동을 금지해야만 한다는 당위만을 앞세운, 글로벌 양극화와 빈곤의 시스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나를 준엄하게 꾸짖는 한마디였다.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다오-네팔의 어린 노동자들의 찾아 떠난 여행' ⓒ 고즈윈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다오-네팔의 어린 노동자들의 찾아 떠난 여행' ⓒ 고즈윈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네팔의 농촌마을을 떠나 카트만두에서 일하고 있는 그 아이들로부터 아동노동을 끊어내는 길은, 그 아이들이 고향마을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 곧 고향마을의 자립 및 자활시스템과 더불어 마을에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공정무역은 그 아이들의 고향마을을 지속가능한 마을, 자립가능한 마을로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네팔 커피를 사들여 일본 구마모토에서 공정무역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고향마을을 떠나고 있었고, 고향마을을 떠나 카트만두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이번엔 중동으로, 말레이시아로 혹은 한국과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커피와 같은 공정무역 한 두 품목 생산만으로 이들의 발걸음을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마을이었다. 자립과 자활을 향한 마을 단위의 꼼꼼하고 치밀한 계획 수립과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악순환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건 공정무역 제품을 소비하는 한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있는 구마모토만 해도 몇 년 전에 있었던 대규모 지진의 상처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터라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바다 건너 농산물을 왜 비싸게 사야 되느냐는 식이다. 공정무역이란 국경을 넘어선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거래일 터인데, 커피 뒷면에 새겨진 공정무역 인증마크와 홍보문구만으로 구마모토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어내기는 그다지 쉬워 보이지 않았다.

동아시아 공정무역 10년, 이젠 동아시아 이주 공생 '마을' 네트워크

네팔 공정무역 커피를 판매하기 시작한 지가 올해 5월이면 꼭 10년이 된다. 10년 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종종 위안을 가져보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좀 더 냉정하게 스스로를 들여다봐야할 것 같았다.

공정무역은 커피마을 아이들의 도시행도, 어른이 된 아이들의 한국행 혹은 일본행도 막지 못했다. 그건 네팔 농촌마을의 자립과 자활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네팔이나 베트남, 캄보디아 농촌마을 아이들만 자기가 살던 마을을 떠난 것이 아니다. 충남 홍성에서 만난 한 고등학교 선생님은 성적이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아이들을 위해 지자체가 특별한 배려를 해선 안 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상위 10퍼센트의 아이들은 그 마을을 떠나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아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한 번은 구마모토 시에서 자동차로 3시간 이상 걸리는 우시부카(牛深) 출신의 한 학생에게 졸업하게 되면 고향마을에서 취직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학생은 대답 대신 자신이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는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고향 농촌마을을 떠나는 것은 네팔이나 베트남이나 한국의 농촌이나 일본의 농촌마을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과 일본의 아이들이 떠나버린 그 농촌마을을 네팔과 베트남, 캄보디아 청년들이 채워가고 있다는 것. 이주 먹이사슬을 통한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Supply Chain : 공급사슬)의 구축, 다시 말해 한국과 일본의 식탁을 농업이주민 청년들에게 맡기는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동안 공정무역을 해온 네팔과 라오스의 농촌마을은 한국과 일본의 국경 너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한국 농촌에도, 일본 구마모토 농촌에도 들어와 있었다. 특히 구마모토는 최근 5년 동안 농촌 이주노동자들이 2.2배나 늘어나, 홋카이도와 함께 최근 가장 급격하게 늘어난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제1세계엔 제1세계만이 아닌 제3세계가 함께하고 있었고, 북쪽 세계에도 북쪽 사람들만이 아닌 남쪽 사람들이 함께 들어와 살아가는 이른바 '남북 한몸 국가' 시대에 우리는 이미 편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농촌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론 2-3년, 길어야 5년 동안의 체류만이 가능한 단기체류 이주민들이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장기체류하기 위한 시스템 만들기도 필요하겠지만, 이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고향마을로 돌아가야 한다면, 이들이 귀국 후 한국과 일본에서 습득한 농업기술을 토대로 국경을 넘어선 농촌 마을간 공정무역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역시 필요해 보였다.

아이들이 네팔 농촌마을과 카트만두를 떠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해외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귀국 후 프로젝트, 곧 해외 농업 이주노동자들을 통한 '떠나온 마을-들어온 마을'간의 공정무역과 농업이주민 노동자들과 농장경영주들이 함께 만든 농산물을 판매할 지역 마르셰(시장/교역) '우리 안(도농간)의 공정무역'이 필요했다.

네팔과 라오스 공정무역 커피를 10년 동안 일본 구마모토를 중심으로 공급해왔지만, 앞으론 방향을 바꿔 동아시아 마을간(네팔/라오스 커피마을과 일본 구마모토·규슈 마을) 공정무역 일본 구마모토·규슈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생산해낸 농산물의 공정무역 두 축으로 진행해 나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는 공정무역 커먼즈와 마을 마르셰 만들기에 힘을 싣기로 했다. 하지만 좀처럼 한걸음을 내딛기 위한 입구, 실마리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접한 것이 에히메(愛媛)현 무차차(無茶々) 농원 소식이다.  

무차차 농원은 에히메 현에서 유기농으로 감귤을 생산하는 농가로 1974년부터 45년 동안 지역 단위의 농사조합법인, 지역협동조합, 어민과의 협업 등을 이루어 직판회원만 1만 명, 매출 10억 엔(약 100억 원)을 일궈낸 모범적인 농촌 커뮤니티를 만들어낸 곳이다. 하지만 무차차 농원이 빛을 발하는 것은 화려한 유기농 커뮤니티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기보다 농업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선 농업 공생 네트워크 -공정무역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 무차차 농원이 있는 아케하마(明浜) 마을을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 3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중산간 지역에 귤농원이 있고 그 밑에 어촌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신명직
▲ 무차차 농원이 있는 아케하마(明浜) 마을을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 3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중산간 지역에 귤농원이 있고 그 밑에 어촌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신명직
▲ 무차차농원 입구. 여기저기 무차차농원을 알리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  신명직
▲ 무차차농원 입구. 여기저기 무차차농원을 알리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 신명직

무차차 농원을 비롯한 지역 커뮤니티 역시 고령화와 청년들의 이농 현상을 피해갈 순 없었는데, 그 결과 무차차 농원과 지역 커뮤니티는 농업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현행 이주노동자 정책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판단, 이들은 직접 베트남 중남부에 위치한 다크라크(Daklak) 지역에 유기농 실습장과 이주노동자 파견 및 귀국 이주노동자 생산 판매 시스템을 만들었다.

앞으로 두 세 차례에 걸쳐, 이들 무차차 농원과 지역 커뮤니티가 에히메 현 동쪽 해변마을을 중심으로 어떻게 유기농업-어업 생산, 가공, 판매 클러스터를 만들어냈는지, 그리고 농업 이주-귀국 노동자를 매개로 어떻게 베트남과의 마을간 유기농업 공정무역 네트워크를 만들어갔는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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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직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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