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잇다②] 100세까지 웃으며 일하는 시골마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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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잇다②] 100세까지 웃으며 일하는 시골마을의 비밀
농업이주노동을 매개로 한 베트남 마을과의 유기농 네트워크 : 일본 무차차 농원(2)
  • 2020.04.14 17:30
  • by 신명직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교 교수)

"어린이는 도구를 들고 일하는 대신 연필을 들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이크발 마시흐)" 

이크발 마시흐는 수제 카펫 공장의 열악한 아동노동을 현실을 고발했고, 파키스탄의 1만 명의 어린이들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하지만 처참한 생활환경은 시대와 장소를 바꾸어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존재하거나 확대되고 있다.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의 저자 구마모토가쿠엔 대학 동아시아학과 신명직 교수는 저서를 통해 네팔의 아동노동의 현실을 알렸다. 그리고 이러한 아동노동과 이주노동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대안으로 '동아시아공생문화센터'를 설립하고 공생무역을 알려왔다. 공생무역의 개념을 확장해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의 마을들을 잇는 로컬-상생과 탈국가적인(transnational) 마을에 대한 가능성을 라이프인에 공유한다. [편집자주]

 

한국과 일본의 식탁을 지켜주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따뜻한 밥과 반찬을 준비해주신 이들에게 '잘 먹겠습니다'라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릴 때, 낯선 땅 낯선 문화 앞에서 버벅대며 비지땀을 흘릴 동남아시아 청년들도 포함되어 있을까. 

일본의 농업이주노동자는 현재 9천여 농장에 3만 명선. 10년 전에 비해 3.4배나 늘어난 수치다. 한국과 일본의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이처럼 늘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값싼 노동력도 원인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일손부족 때문일 것이다.

안전하진 않지만 값싼 외국농산물들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5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도 비용은 턱없이 비싼데도 가격은 저렴한 농산물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가족농과 소농은 해체되어 갔고, 청년들의 이농과 고령화로 농촌은 만성적인 일손부족에 허덕였다. 일본은 70년대부터, 한국은 90년대부터 상황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다소 비싸더라도 안전한 농산물을 원하는 소비자들과 유기농산물을 생산해내려는 생산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활협동조합을 통한 산지직거래 네트워크가 만성적인 일손 부족까지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선 미등록(불법체류)이건 등록이건 가릴 것 없이 농업이주노동자들을 농촌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여전히 가족농과 소농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탓에, 노지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에선 이주노동자들을 1년 이상 상시고용하기 어려워지자 계절이주노동도 합법화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역시 생산자 협동조합과 소비자 생협 등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수 귀촌청년을 제외하곤 농촌을 떠난 청년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농촌에서 60대는 여전히 청년대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농업 이주노동력이 언제까지 안정적으로 공급될지에 대해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발 농업 이주노동자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고, 동남아시아 농업 이주노동자들도 한국과 일본의 농촌과 도시 가운데 보다 조건이 좋은 곳을 고르기 시작했다. 문화시설도 별로 없고 한마디 대화조차 할 수 없는 한국과 일본의 농촌은 이들에게도 점차 거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해결책은 분명하다. 농업 이주노동자의 이주와 귀환이 일회적이고 우연한 것이 아니라, 가족농과 소농에 의한 상호보완적인 농업이 국경을 넘는 농촌마을간 협업과 협동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이주노동자들을 떠나보낸 동남아시아 농촌의 희생 위에 한국과 일본의 농촌이 살아남는들 그것이 대체 얼마나 지속가능할 것인가. 오늘 우리 식탁위에 올라온 강원도 고랭지 배추도 남해에서 갓잡아 올린 생선도 이미 순수한 한국산 먹거리가 아니다.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스며든 '메이드 인 이스트 아시아'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70년대 '복합오염'된 일본을 구하는 길 '무차차'

일본 에히메(愛媛)현 무차차 농원(無茶々園)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1974년), 아케하마(明浜)마을 가리에(狩江)지구의 한 절터에 딸린 농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가타야마 모토오사(片山元治)를 비롯한 세 청년은 무농약 귤 재배 실험농장을 시작하면서 그곳에 '무차차'란 이름을 붙였다. 

▲ 무차차 농원을 시작한 청년들(1974년) ©muchachaen
▲ 무차차 농원을 시작한 청년들(1974년) ©muchachaen

그 지역은 일찍이 에도시대 때부터 농작물 자급을 위해 급경사의 중산간 지역에 계단식 밭을 만들어 고구마, 보리, 누에 등의 농사를 해오던 곳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1955년부터 귤농사로 작목을 변경하기 시작했는데, 너도 나도 귤농사로 전환한데다 67년 큰 가뭄으로 귤 값은 그만 대폭락하고 말았다. 청년 가타야마 등이 무차차 농원을 시작하던 그 무렵은 마을 사람들이 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너도나도 화학비료와 제초제 등을 다량으로 사용하던 그런 시기였다. 

▲ (왼쪽)에도시대에 만들어진 계단식 밭 석축. (오른쪽)지금의 계단식 밭 ©muchachaen
▲ (왼쪽)에도시대에 만들어진 계단식 밭 석축. (오른쪽)지금의 계단식 밭 ©muchachaen

조니 뎁이 주인공을 맡아 지난 2월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미나마타'의 모델이기도 한 '미나마타 병'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도 대략 이 무렵이다. 일본은 1960년대 고도성장이 남겨놓은 각종 공해병으로 70년대 초 전국이 끙끙 앓고 있었다. 청년 다카야마 등이 시골마을에서 무농약재배 농원을 시작한 것도 농약과 화학비료로 죽어가는 땅과 바다와 농민을 살려내기 위해서였다. 

70년대 초 다카야마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유기농업에 관해 쓴 한 권의 소설에 푹 빠져있었는데, 그것은 여류 소설가 아리요시 사와코(有吉佐和子)가 쓴 '복합오염'이란 소설이었다. 축사의 사료는 물론 가공식품으로 쓰이는 항생제나 성장호르몬제가 어떻게 땅과 인간을 피폐화시키고 있는지 등을 그려낸 소설로, 아사히신문에 1974년부터 1년간 연재되는 동안 일본의 기업가, 정치가, 농림성과 후생성 관료들을 직접 거론해 끊임없이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많은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무농약 무비료, 친환경 순환농업, 그리고 저비용 친환경 농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 (왼쪽부터) 아리요시 사와코의 소설 '복합오염(shincho bunko)'과 다양한 번역본들(연희출판사/형성사/장락). 한국에는 1978년 권숙표 교수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원진레이온 사건 등으로 환경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던 1988년 최열(1993년 환경운동연합 출범)에 의해 다시 번역되었다.
▲ (왼쪽부터) 아리요시 사와코의 소설 '복합오염(shincho bunko)'과 다양한 번역본들(연희출판사/형성사/장락). 한국에는 1978년 권숙표 교수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원진레이온 사건 등으로 환경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던 1988년 최열(1993년 환경운동연합 출범)에 의해 다시 번역되었다.

흔히 '전 세계 자연주의자들의 경전'이라고 불리우는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의 "자연농법-짚 한오라기의 혁명"이란 책이 출판된 것(1971년)도, 이치라크 데루오(一楽照雄)가 '일본 유기농업연구회'를 설립(1971년)한 것도 대략 그 즈음이었다. 일본의 70년 안보투쟁에서 패배한 이들이 새롭게 모색한 생활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일본의 유기농업, 산지직거래(産直) 운동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무차차 농원의 실험 역시 본 궤도에 올라섰다. 

'1만회원 10억엔' 비즈니스 모델과 '100세까지 웃으며 일할' 복지모델

45년의 역사를 지닌 무차차 농원의 발전단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3단계에 걸쳐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①몇몇 농가가 유기재배를 시작한 뒤, 도시부 생협과의 산지직거래로 일정 궤도에 오르자 지역에서 참가하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한 '초기단계'(70-80년대), ②농가조직을 법인화하고, 감귤류 뿐 아니라 지역 해산물도 거래처에 판매하게 된 '안정단계'(90년대), ③지역과 국경을 넘어선 생산자들과의 연대 및 지역 복지사업에 이르는 '발전단계'(2000년대)가 그것이다. 

이를 다시 분야별로 재분류해보면, (1)감귤생산(농사조합법인 무차차농원), (2)판매/가공(지역법인 무차차농원), (3)대규모농장(Farmers Union 호죠), (4)지역복지사업(百笑一輝)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를 총괄하는 것이 '지역협동조합 무차차농원'이다. '지역협동조합'이라는 큰 틀 안에 농사조합법인(생산), 지역법인(판매/가공)과 지역복지사업을 모두 담아놓은 셈이다.  

▲ 지역협동조합 무차차농원'의 관계도
▲ 지역협동조합 무차차농원'의 관계도
▲ 무차차 농원의 품목별 매출액(2015년)
▲ 무차차 농원의 품목별 매출액(2015년)

여기서 방점이 찍혀야할 곳은 '지역'이다. 한두 가족농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지만, '지역' 내 가족농들이 '지역'협동조합이나 '지역'법인 등으로 집단경영 시스템을 구축할 경우, '지역'협동조합 무차차농원처럼 1만명의 회원에 10억엔의 매출을 올리는 '시골마을(지역사회협동체)'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시골마을'은 일본어 '이나카(田舎)'의 번역어이다. 무차차 농원 설립자 가타야마 씨는 '이나카(田舎)'를 종종 '지역사회 협동체'로 설명하기도 했는데, 따라서 이 글에서 '이나카(田舎)'의 번역어인 '시골마을'은 단지 서정적인 고향마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아닌 지역사회의 협동체를 의미한다.). 

설립자 가타야마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족노동'을 '집단가족노동'으로 전환시킨 '지역사회 협동체(田舎)'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사실 하나의 시골마을을 지속가능한 마을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커뮤니티와 커먼즈만 해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학교는 물론 빵집, 이발소, 보육원, 병원, 서점, 영화관, 술집, 노인복지센터 등이 필요하고, 이들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마을이 유지될 수 있다. 가족농을 해체시키고 근대화된 대규모 농장이 들어설 경우 이같은 생활커뮤니티와 자발적으로 구성된 커먼즈들에 의해 지속가능한 '시골마을'이 형성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들 커먼즈를 구성하고 있는 가족농들이 지역협동체를 통해 완성도 높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시골마을'은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역협동조합 무차차 농원'은 마을 감귤집하장에 적외선 과일선별기를 도입하는 한편 IT기술을 통한 생산 유통 시스템을 구축했다. 오렌지주스나 마멀레이드와 같은 2차 가공품은 물론 귤꽃을 이용한 클렌징(화장수), 에센셜 오일 등 자체 브랜드 화장품(yaetoko)까지 판매하고 있다. '지역협동체'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 '지역법인 무차차농원'에서 생산되는 화장품 yaetoco의 핸드크림 ©muchachaen
▲ '지역법인 무차차농원'에서 생산되는 화장품 yaetoco의 핸드크림 ©muchachaen

'지역협동조합 무차차 농원'이 지속가능한 시골마을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골마을 대부분이 처하고 있는 심각한 고령화 현실을 고려할 때 '노인복지' 모델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한 시골마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지역협동조합 무차차 농원은 지역복지 사업체 백소일휘(百笑一輝: 100세까지 건강하게 웃는 얼굴로 인생의 완성기를 빛나게 보내자는 뜻)를 중심으로 2014년부터 2019년에 걸쳐 마을 노인복지 센터 3곳과 지역도시락 서비스(덴포야)를 만들어냈다.  

▲ 지역 노인복지 도시락사업 '덴포야' ©muchachaen
▲ 지역 노인복지 도시락사업 '덴포야' ©muchachaen
▲ 지역 노인복지 도시락사업 '덴포야' ©muchachaen
▲ 지역 노인복지 도시락사업 '덴포야' ©muchachaen

'백소일휘'의 기본이념은 함께 살아가고, 함께 일하며, 자기 집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 이를 위해 고령자가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일거리 이를테면 야채를 재배하거나 집안에서 콩이나 귤껍질을 까는 것과 같은 일거리를 배분하고,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가까운 의료기관과 연계된 터미널 케어(신체적·정신적·사회적)를 현실화시켰다. 자신의 마지막 모습까지 보살펴줄 '지역사회 협동체'에 가족농 구성원 모두가 무한 신뢰를 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 지역 노인복지센터 '미사토(海里)'의 80대 할머니 친구들 ©seikatsu club
▲ 지역 노인복지센터 '미사토(海里)'의 80대 할머니 친구들 ©seikatsu club
▲ 백세까지 웃으며 살아갈 일거리들(채소 가꾸기, 껍질까기, 가벼운 포장일) ©muchachaen
▲ 백세까지 웃으며 살아갈 일거리들(채소 가꾸기, 껍질까기, 가벼운 포장일) ©muchachaen

도시와의 산지직거래에 기초한 지속가능한 농촌 커뮤니티가 지역사회 곳곳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가족농을 토대로 한 '농업(業)'이 비로소 '농촌(村)'을 이루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이농과 고령화 현상은 지역법인 무차차농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솔직히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물론 타 지역의 젊은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1999년부터 '파머즈 유니온 덴포 학교(Farmers Union 天步塾)'를 만들어 전국 각지에서 아이(I)턴(도시에서 태어나 살다가 농촌으로 내려가는 것)하는 젊은농부들을 모집하고 대규모 유기농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도 하고 있지만 실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된다. 

결국 지역법인 무차차 농원은 젊은 해외 농업 이주노동자(기능실습생) 없이는 농촌마을의 지속가능성은 유지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5년부터 베트남 다크라크 성에 기능실습생(일본행 이주노동자) 교육과 송출 그리고 귀환 농업이주노동자들의 정착을 위한 베트남 현지 유기농업 시스템을 구축(Farmers Union Venture)하는데 많은 힘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기능실습생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에히메 현의 지역법인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지역법인 무차차농원은 서일본 전체 유기농업 생산조합 등과 긴밀한 연계를 취하며 문제를 해결해 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선 다음 회에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볼 예정이다. 순환농법(農山漁村순환)에 기초해 농촌과 어촌이 어떻게 함께 '지역협동조합' 안에서 협업 가능한 마을로 바뀌어 갔는지에 대해서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무차차 농원의 창업자 가타야마 씨는 일흔둘의 나이에 지금도 베트남 다크라크의 농장에 머물면서, 앞으로 100년에 걸쳐 '세계 88개 시골마을 연대'를 이루어내고 '일본농업 수호'가 아닌 '세계 가족농업 수호'를 반드시 이루어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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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직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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