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먹거리, 탄소하나의 흥남을 바라보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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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먹거리, 탄소하나의 흥남을 바라보다(中)
  • 2020.07.01 11: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행복은 바로 당신들 손에 달려있다"

1945년 8월 11일에 두만강변 웅기항으로 진입한 소련군은 21일 함흥-흥남, 원산을 해방하였다. 일본의 항복선언이 있던 다음날인 16일에 함흥에서는 형무소에서 석방된 공산주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었고, 또한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함경남도 지부도 결성되어 있었다. 소련군이 함흥에 진주하자 이 두 단체는 합쳐서 "조선 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소련군은 24일에 함흥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함경남도 도청으로부터 접수한 행정권을 이 집행위원회(8월 30일에 함경남도인민위원회로 개칭)에 인계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은 무장해제한 일본군, 경찰관, 판검사 및 고위 행정관료를 억류한 후 평양으로 진격했다. 평양에서는 26일에 입성하여 시가행진을 한 후 평안남도의 행정권을 조만식 장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공산당조직과 건준의 합작)에 인계하였다. 이때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조선인민들이여, 그대들은 독립과 자유를 회복했다. 이제 그대들의 행복은 바로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고 선언했다. 

이제 우리 민족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낼 시대가 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지난날의 고통 때문에 훗날까지 말 못하고 지낸 분들도 있었으니 일본군에 "봉사"하라고 끌려갔던 이른바 종군위안부 여성들이었다. 북한 함경도에도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는데 일본군 제19사단 본부가 주둔한 나남(현 청진시 나남구역)에서 두만강 국경에 이르는 주둔지에 위안소를 운영하였다. 나남에서는 조선인 여성 약 60명이 일본군 전용으로 민간업자가 만든 십수 동의 위안소 건물(명칭: 미와노 사토三輪の里)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북한에서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은 1992년이 돼서야 밝히기 시작했다. 노동신문 1992년 7월 8일 자에 김영실 할머니는 함경북도 아오지에 있던 위안소에 끌려가 경흥군 홍의리(현 나선시 홍의리) 군 주둔지의 일본군으로부터 당한 피눈물 나는 학대를 고발하였다. 해방 75년이 지나가는데 이분들은 행복하게 살았을 수는 있었을지라도 일본 정부의 사과와 책임지는 행동을 받는 "진정한 행복"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 함경북도 청진시 나남구역에 남아있는 북한의 구 일본군 19사단(나남사단)의 위안소시설과 이를 증언한 현지 북한주민들 ⓒ다큐사진작가 이토 다카시 (伊藤孝司), 2015
▲ 함경북도 청진시 나남구역에 남아있는 북한의 구 일본군 19사단(나남사단)의 위안소시설과 이를 증언한 현지 북한주민들 ⓒ다큐사진작가 이토 다카시 (伊藤孝司), 2015

38도선 이북 북한지역을 해방한 소련군은 먼저 각 도의 현지 조선인이 지방정부를 만들도록 하고 나중에 중앙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구상을 실행했다. 평북, 황해도, 함북 등 각 도의 통치조직은 9월 말까지 구성을 완료하였다. 북한의 소련군 사령부는 "소비에트 민정청"을 설치하여 정치장교들이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설립(1946년 2월)을 후원하고 감독했다. 이 점은 남한에서 미군이 직접 서울에 "미 육군 군정청"을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지방의 자생적인 통치 질서를 봉쇄한 것과 대비된다. 이렇게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달랐던 점은, 남한에서 권력이 서울에 집중되는 현상과 북한에서 "지방주의"(또는 지방 할거주의) 현상이 나타나는 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원산에 리주하(이주하)가 있었다면 흥남엔 주녕하(주영하)가 있었다. 함경남도 출생인 주영하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30년에 흥남의 조선질소비료의 직원으로 들어가 적색노조 활동을 하였다. 조선적색노동조합 함남위원회 함흥위원회의 책임자였고, 1935년에 구속되어 6년 형을 선고받았다. 흥남에는 주영하의 쟁쟁한 선배활동가들의 반일투쟁이 있었다. 한 예로 모스크바공산대학 4년 과정을 2년에 마친 우수한 두뇌의 흥남 좌익대표자회의 지도자 김원묵(일명 김해일)은 엿장수로 꾸미고 노동자 조직 활동을 하다 1932년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흥남 지방에서 적색노조 사건 발생은 총 127회나 되어 4,700여 명이 피검투옥 된 바 있다.

해방 후 이주하는 서울로 갔지만 주영하는 북한에 남았다. 1946년 8월에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면서 국내파 공산주의 세력의 대표 격으로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정치위원, 48년 3월에 노동당 부위원장 및 정치위원으로까지 출세하였다. 48년 4월에는 남북연석회의 조직준비위원장을 했고, 이어 9월에 북한이 정부를 수립한 후에는 교통상, 주소련대사, 외무성부상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6.25전쟁 후 1953년에 이승엽 등 남로당계가 숙청될 때 반당. 종파주의 혐의로 같이 숙청되었다. 노동신문 1953년 3월 5일 자에는 외무성 초급당 총회 보도에서 주영하가 "일제시대에 혁명을 변절한 자이며 우리 당에 기어든 후에는 당의 통일을 와해시키려는 종파 행동을 감행한 전형적인 기회주의 분자였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고 비판하였다. 주영하는 사법적 재판 없이 노동당내의 비판회의만으로 함경남도 지방공장으로 보내졌고 1956년에 복권되었다 다시 노동교화소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흥남을 대표하던 노동운동계 좌익활동가들이 해방후 종파주의와 지방주의로 비판당한 것은 원산의 경우와 같지만, 흥남은 주영하나 주인규 처럼 대표인물이 숙청되는 역사를 경험했다. 

김일성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흥남을 첫 방문한 것은 1946년 4월 16일이었다. 김 위원장은 흥남공장 노동자들 앞에서 "친애하는 동무들. 동무들은 진실한 민주주의국가 건설을 위하야 가일층 생산 돌격에 분기하라"는 생산격려 연설을 30분간 하였다(노동신문 1946년 5월 31일). 이 때 함흥의 기자이면서 시인이었던 리찬이 즉석 시를 낭송하여 박수를 크게 받았는데 후에 평양으로 가서 1947년에 김책의 도움을 받아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하였다. 

해방된 흥남은 어떻게 변하였는가, 흥남이 가진 기술은 어떤 힘을 발휘하였나. 북한에서 가장 공업화된 중화학 도시 흥남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북한 화학공업의 메카 흥남

해방 후 북한 제일의 화학공업도시 흥남의 대규모 공장들은 국유화되어 "흥남지구인민공장"으로 불렸다. 여기엔 흥남비료, 본궁화학, 흥남제련, 흥남화학, 용성기계 등 5대 인민공장이 포함되었고 약 2만 명의 종업원을 포괄했다. 흥남지구 전체로는 2만6천 명의 종업원이 있어 해방 전 전성기 때보다 종업원 수가 절반 정도로 줄었다. 해방 직후 일본군 패잔병들이 무장단을 조직해서 흥남의 공장을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할 때 흥남공장의 직원들이 희생을 내면서도 공장을 사수하였고 흥남공장장의 방침이 일본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여 공장파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파괴가 없었던 덕에 공장은 계속 가동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공장인 비료공장은 세계 3위 규모에 종업원 수 9천 명으로 해방 전과 큰 차이가 없었고 여기서 전국에서 필수적인 비료를 혼자 감당하였다. 북한에 없는 코크스탄은 해방 전에는 홋카이도 탄광과 만주 탄광에서 공급받았으나 해방 후 공급이 끊긴 탓에 소련이 지원했다. 

그런데 수입 코크스탄은 물론이요 국내 무연탄도 주요한 원료이자 연료인데 이를 수송할 철도가 제 기능을 못했다. 보일러 연료만으로도 1년에 60만 톤이 필요했다. 석탄재고가 떨어져 보일러 가동을 못 하면 공장이 문을 닫는 급박한 문제를 해결한 이는 기술자 전일환과 최종환이었다. 전일환은 함경북도 나진에서 태어나 1935년 나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전기주임기술사 제1종을 딴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 해방 후 흥남인민공장 조사계획부 전기계장의 중책을 받아 석탄보일러를 동양최대규모의 전기보일러로 개조하여 연간 석탄 40만 톤을 절약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최종환은 흥남비료의 증기 계장으로서 보일러 설계에 공을 세워 김일성 인민위원장으로부터 모범노동자 칭호와 표창을 받았다. 그는 최고인민회의대의원, 함남도인민위원, 노동당 함남도당위원으로 성공했다. 

또한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고 흥남에 남아 기술지도를 계속한 일본인 기술자들의 협력도 큰 힘을 발휘했다. 해방 후 흥남지구에 기술사 자격을 가진 조선인이 6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흥남인민공장 조사계획부에 근무한 일본인 기술자 곤기찌로(近吉郎)는 석탄 대신에 흥남에 풍부한 수소연소장치로 보일러 연료를 구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이를 보도한 노동신문(1946년 5월 30일)에 따르면 수소연료 사용으로 증기 1 톤 생산에 약 49원이 절약되었다고 한다. 흥남은 이러한 기술자들의 노력이 있어 난관을 극복하며 생산을 이어나갔다. 기술은 사람이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위의 노동신문 기사는 일본인 기술자 곤이찌로가 "일본은 패망하였으나 기술자로서의 사명은 세계근로인민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사업에 헌신하는 데 있는 것이며 조선의 공업발전은 단지 조선인민뿐만 아니라 일본은 물론 전 세계 인민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라는 자각"을 가졌다고 언급하였다. 

그래도 흥남비료공장이 1946년에 생산한 실적은 유안 8만 톤, 유린안 9천 톤, 석회질소 1만 톤으로 생산능력에 비해 각각 24%, 33%, 46%에 그쳤고 2억 원의 결손을 내었다고 한다. 원료와 연료, 자재 공급이 정상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화학비료 소요량이 약 40만 톤이었다고 하는데, 이후 북한에서는 증산운동이 몰아친다. 동시에 노동규율과 임금체계에 대한 재검토도 이루어졌는데, 노동신문 1946년 12월 15일 자에는 "흥남공장에서는 능률에 대한 누진적 대우제도 운동을 아직 시작도 안하고있다. 모범로동자에 대하여 식량 주택 등 조건우대에 대한 특별한 사업이 없고 상습결근자 태만자에게 동일한 식량배급과 주택을 보장하고 있음은 혹심한 사례들이다. 직업동맹 흥남시위원회 일꾼들을 위시하여 인민공장 일꾼들은 합리적 로동력조직에 대한 연구와 대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관리측의 합리적 로동력 정리에 대한 의견을 비방 내지 반대하며 생산기관을 마치 건달꾼 수용소나 실업구제소로 알고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직업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 결정서를 통해 "평균대우제를 철폐하고 모범로동자에게 식량 및 우량주택 제공에 대한 방책과 상습결근자 태만분자에 대한 차별배급책을 실시하여 국가재산보호애호하는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1946년의 일이다. 

한편 흥남본궁공장에서는 해방전부터 소금을 전기분해하여 염소가스를 발생 시켜 양잿물, 염산, 액체염소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염소가스는 1913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사용하여 1만5천명을 중독시킨 바 있는 독가스의 일종이다. 노동신문은 이 본궁공장에서 275명의 종업원들이 악독한 염소 냄새를 맡으며 언제나 95% 이상의 출근성적으로 염소가스에 삭고 파괴된 기계를 수리하여 목표량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떨어진 작업복 밑으로 근육이 그대로 보이도록 일을 하면서도 이를 개의치않고  조금도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다고 선전하였다(노동신문 1946년 7월 16일).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생산 돌격의 뒷순위였던 것이 해방 후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도 흥남지구 노동자들을 위한 후생 문화시설은 해방 2년 사이에 상당한 진전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흥남지구인민공장의 2만여 명 종업원들 주택의 경우 난방장치 음료수 수도 전기 등이 완비된 10,520호의 문화주택과 1,400명 수용의 합숙소가 있어 46,000여 종업원 가족이 살게 되었다. 이외에 호텔 1개소, 급식소 4개소, 두부제조소 4개소, 양돈장 2개소가 설치되었다. 채소밭이 제공되었고 목욕탕 137개소, 배급소 6개소, 이발소 9개소, 양복점 1개소, 공동세탁소 1개소, 제면소 1개소, 문화클럽 41개소, 민주교양실 130개소, 도서관 2개소, 과학관 1개소, 영화관 1개소, 노동회관 6개소, 운동장 27개소, 휴식소 100개소, 탁아소 4개소, 아동공원 1개소가 배치되었다. 

▲ 흥남공장 노동자들이 살고있는 흥남시 유정리의 사택. 유정리 사택은 해방전 일본인 기술자들이 살던 사택이었다. ⓒ노동신문(1949년 9월 7일)
▲ 흥남공장 노동자들이 살고있는 흥남시 유정리의 사택. 유정리 사택은 해방전 일본인 기술자들이 살던 사택이었다. ⓒ노동신문(1949년 9월 7일)

노동자 재교육 측면에서는 주간 야간의 기술원 양성소와 건국공업학교, 경리원양성소, 사무원강습소 등이 설치되었고 직장 내 교육으로 기능사시험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예를 들어 1947년 8월 시점에서 흥남지구인민공장의 문맹 노동자 1,700명이 1948년 3월까지 문맹을 퇴치하여 인민학교(주: 초등학교) 졸업생과 함께 1년제 초급기술원양성소에 입소하여 기능공으로 성장하며 다시 3년제 기술학교(중등과정)를 거처 흥남화학전문학교, 흥남기술전문학교 같은 기술전문학교(주: 남한의 공업고등학교)와 신설된 4년제 흥남공업대학에까지 진학할 길이 열렸다. 흥남공업대학에는 전기공학부, 화학부, 유색금속공학부, 기계공학부, 재료화학부, 그리고 공장의 노동자와 기술자들을 위한 야간대학부와 특별화학부를 두었다. 

▲ 흥남화학공장에서 생산실습하는 흥남화학전문학교 졸업반학생들 ⓒ노동신문(1950년 5월 29일)
▲ 흥남화학공장에서 생산실습하는 흥남화학전문학교 졸업반학생들 ⓒ노동신문(1950년 5월 29일)

1955년에 김책공업대학의 교원이 되는 신기천의 경우는 입지전적이다. 그는 함경남도 장진군 산골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와 흥남부두에서 노동하다가 흥남비료공장 전기배전소 노동자로 되었다. 해방 후에 비료공장 지배인이 그를 흥남기술전문학교로 보내 배우게 했다. 물리 수학 과목의 기초지식이 없던 그를 학교 당세포 위원장 림기수 선생이 개별지도를 해주었고 졸업하여 비료공장의 기술자가 되었다. 좀 더 배워야겠다는 그의 간절한 욕망이 있어 그는 공장의 배려로 김책공업대학 2학년에 편입하였으며 미분, 적분 같은 고등수학의 난관을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도와주어 풀어나갔다고 한다. 대학 전기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레닌그라드 전기대학 연구생이 되었다. 4년간 유학을 마치고 평양에 귀국한 날 8년 만에 만난 어머니는 "너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었구나. 이 은공을 어떻게 갚는단 말이냐"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신기천은 그 후 김책공업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 김책공업대학 교원 신기천 ⓒ 노동신문(1955년 7월 10일)
▲ 김책공업대학 교원 신기천 ⓒ 노동신문(1955년 7월 10일)

그리고 의료사회보험 측면에서는 피보험자 2만 5천여 명 피부양자 7만여 명으로, 피보험자 1만여 명과 피부양자 6천여 명이 의료상 혜택을 받았다. 의료시설로 병원 4개소와 각 공장마다 간이진료소가 배치되었다.

본궁공장에서는 해방 전에 탄소하나화학공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합성연료 생산을 군수용으로 해왔는데 이를 민수용으로 전환한 제품을 내놓았다. 즉 석탄과 석회석에서 전투기 연료유를 합성해내는 기술을 활용하여 기술자 오동욱이 카바이드 연료로 알콜주정제조에 성공했다. 1947년 5월에  92도의 주정을 만들었는데 이 주정을 가공하여 약품, 음주용 술들을 제조했다. 이를 통해 술 제조에 들어가는 양곡 3만여 석을 절약하며 4억 원의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노동신문 1947년 5월 29일). 군수용을 민수용으로 전환한 첫 제품이 알콜주정이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북한은 1947년 하반기부터 생산증대를 위해 본격적인 "증산돌격운동"을 시작했다. 그 시작을 알린 것이 흥남비료공장의 종업원대회 호소문(1947년 7월 9일)이었다. 8.15해방 2주년까지 증산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는데 유안비료를 전월 대비 43% 생산증대 등을 통해 1947년 생산계획을 11월 말까지 완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호소문이 함흥방송국을 통해 마이크로 함흥-흥남 전역에 전파되었는데 이에 호응하여 다음 날 10일에 흥남 인민공장들과 함흥철도가 종업원대회를 열고 증산돌격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대중적 호소운동을 이끈 사람은 신득손이라는 노동자였는데 그는 1911년 빈농집안에서 태어나 고용살이로 살다가 해방후 흥남비료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3.1운동 때 희생당하였기에 신득손은 부친의 유지를 계승하여 흥남공장에서 애국노동운동을 호소하는 선두에 섰다고 한다(노동신문 1948년 2월 6일). 이러한 대중 운동적 방식이 북한의 특징이기도 한데, 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은 7월 12일에 결정 제53호를 발표하여 “본 증산돌격운동을 전산업 교통 체신 등 각 부문의 공장 광산 직장의 로동자 기술자 및 사무원들에게 호소하여 본 운동에 호응하는 일대 증산돌격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전국의 각 공장에서 호응 종업원대회가 열리고 증산돌격운동의 열풍이 불었다. 결국 흥남지구인민공장들은 1947년 계획을 초과달성했고 12월 27일 저녁에 흥남비료 공장 창고에서 생산계획실행 경축대회가 종업원, 농민, 학생, 일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함경북도 성진 출신으로 북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고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김책이 북조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훈사를 하였다. 성진은 1951년 김책의 사망 후 김책시로 개칭되었다. 흥남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1948년과 49, 54, 55, 56년에도 흥남비료공장이 증산돌격 종업원대회를 개최하여 전국에 호소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 흥남지구공장 연도계획초과달성 경축대회를 보도하는 노동신문지면(1947년 12월 30일)
▲ 흥남지구공장 연도계획초과달성 경축대회를 보도하는 노동신문지면(1947년 12월 30일)
▲ 흥남비료공장에서 생산된 비료 ⓒ 노동신문(1949년 8월 20일)
▲ 흥남비료공장에서 생산된 비료 ⓒ 노동신문(1949년 8월 20일)

그러나 6.25전쟁 3년 동안 북한의 공업시설 대부분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평양과 원산이 대표적인 경우였지만 흥남도 피해를 입었다. 1950년 7-8월 중에 미군 폭격기가 흥남을 집중 폭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1950년 12월의 흥남철수때도 흥남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흥남의 파괴는 원산 같은 전면적인 파괴는 아니었다. 집중적인 파괴공격을 받은 곳이 흥남화학공장, 흥남비료 유안제조공장, 본궁화학공장 등이었다. 이 공장들과 도시를 복구하는데 소련과 동독이 자금과 기술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소련 정부는 10억 루블과 많은 기술자들을 보내 흥남지구 공장의 복구를 도왔다. 

▲ 흥남비료공장 복구 정비에 나선 노동자들 ⓒ 노동신문(1953년 10월 7일)
▲ 흥남비료공장 복구 정비에 나선 노동자들 ⓒ 노동신문(1953년 10월 7일)
▲ 흥남비료공장 복구 건설을 협조하는 소련 기술자들 ⓒ 노동신문(1954년 6얼 28일)
▲ 흥남비료공장 복구 건설을 협조하는 소련 기술자들 ⓒ 노동신문(1954년 6얼 28일)

소련의 도움으로 흥남비료공장 유안제조공장이 1955년까지 연산 3만 톤 생산 규모로, 그리고 56년까지 연산 6만 톤, 57년 말까지 연 20만톤을  생산하는 규모로 복구되었다. 소련은 이어 1958년까지 연산 10만 톤 생산능력을 가진 질안비료공장을 새로 건설하는 것도 지원했다.

▲ 복구된 흥남비료공장 합성직장 ⓒ 노동신문(1955년 7월 14일)
▲ 복구된 흥남비료공장 합성직장 ⓒ 노동신문(1955년 7월 14일)
▲ 흥남 질안비료공장에 드리워있는 테이프를 끊는 김일성 수상 ⓒ 노동신문(1958년 4월 22일)
▲ 흥남 질안비료공장에 드리워있는 테이프를 끊는 김일성 수상 ⓒ 노동신문(1958년 4월 22일)

동독 정부는 1955년부터 함흥과 흥남의 시가지 복구를 도왔다. 함흥시는 동독의  원조로 도시복구를 위한 건재 생산공장들을 세워 주택, 함흥의과대학 교사와 기숙사를 비롯하여 병원, 식당, 목욕탕, 세탁소, 저장고 등 교육문화기관과 편의시설들을 정비했다. 

▲ 동독의 지원으로 정비된 함흥시 피크 거리 ⓒ 노동신문(1961년 5월 5일)
▲ 동독의 지원으로 정비된 함흥시 피크 거리 ⓒ 노동신문(1961년 5월 5일)

1957년 3월 26일에 함흥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정전 직후에 왔을 때 혹 심히 파괴된 흥남 공장들은 나에게 비참한 인상을 남겼었습니다. 당시 파괴 정도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심하였었는바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공장 복구를 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대학생들이 복도에서 공부하고 있는 화학 공대를 찾아가 선생, 학생들과 담화하고 우선 그들이 동원되어 공장들의 파괴 정형을 조사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제 일 같은데 그 공장들이 오늘은 벌써 훌륭히 복구되어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함흥 주민들의 생산협동조합은 지방공업의 기반

1952년부터 함흥에 조직되기 시작한 생산협동조합은 함흥-흥남지역의 자원을 활용하여 주민 생활에 필요한 소비품을 생산 공급하였다. 도시수공업자, 상인, 일반 주민,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만든 생산협동조합은 흥남보다는 함흥에 많았다. 1952년 함흥피복생산협동조합에서는 지방에 자연 풀에서 섬유를 채취하여 옷을 짜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대까지 노동신문에 보도된 생산협동조합들로는 흥남철공생산협동조합, 함흥문방구생산협동조합, 함흥일용품생산협동조합, 함흥동력기계생산협동조합, 흥남헬트모자생산협동조합, 흥남공업품생산협동조합, 함흥공업품생산협동조합, 함흥조미료생산협동조합, 함흥도료생산협동조합, 함흥목재가공생산협동조합, 함흥도가니생산협동조합, 함흥방사생산협동조합, 함흥문화일용품생산협동조합, 함흥알루미니움생산협동조합, 천리마함흥가방생산협동조합 등이 있다. 

이중 노동신문에 소개된 함흥동력기계생산협동조합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1955년 4월에 양철 가공업자, 전기기계 수리업자 등 15명으로 조직되었던 우리 조합이 가정에서 쓰는 양철 함지, 세면기 등을 땜하는 사업을 주로 하였을 초기에 생산 도구라고는 망치, 양철가위 같은 수리 도구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정적 토대도 매우 빈약하며 조합의 공동 축적은 고사하고 조합원들의 쌀값 대금조차 지불할 수 없는 한심한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조합관리위원회에서도 양철가공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 하여 일확천금을 꿈꾸는 투기적인 일부 조합원들의 의견에 맹동하여 자주 업종을 전환하였습니다. 한때는 유리 제품을 생산하기도 하고 그것도 시원치 않아 무연탄으로 알탄을 생산하는 일도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루살이식 방법으로 조합을 꾸려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조합원들은 지방에 잠재한 예비를 최대한으로 동원 이용하기 위하여 앞으로 생산 품종을 어떤 품종으로 하고, 그의 원료는 어떻게 해결하며 또 장차 어떠한 규모의 조합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는 과정에서 동력 기계 생산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업종으로 대담하게 전환할 것을 결의하여 나섰습니다. 우리가 동력 기계 생산을 자기 업종으로 선택한 것은 매 시, 군에 한 개 이상의 지방산업 공장을 건설하라는 수상 동지의 교시에 근거하여 지방산업을 발전시키자면 반드시 전동기, 변압기, 용접기 등 동력 문제를 지방에서 자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바로 이점에 착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 양철 땜과 약간의 전기기계 수리나 하던 우리 조합의 실정에서 높은 기술을 요하는 전동기를 생산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우리 조합에서는 성천강, 호련천 지방에서 200여 톤의 고철을 수집하여 이것으로 흥남비료공장, 룡성 기계공장, 본궁화학공장 등에 가서 필요한 기계 부속품과 교환하든가 또는 그 기업소의 도움하에 필요한 기계의 생산에 착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공장 내에 공작기계의 밑천을 가지게 되고 전동기 생산에 필요한 초보적인 설비들을 해결하면서 전동기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노동신문 1959년 10월 15일)

▲ 소형 전동기를 조립하고 있는 함흥동력기계생산협동조합 조합원들 ⓒ 노동신문(1960년 9월 24일)
▲ 소형 전동기를 조립하고 있는 함흥동력기계생산협동조합 조합원들 ⓒ 노동신문(1960년 9월 24일)
▲ 염화비닐로 제품을 만들고 있는 흥남공업품생산협동조합원들 ⓒ 노동신문(1960년 11월 11일)
▲ 염화비닐로 제품을 만들고 있는 흥남공업품생산협동조합원들 ⓒ 노동신문(1960년 11월 11일)
▲ 판식 가구를 생산하는 함흥목재가공생산협동조합원들 ⓒ 노동신문(1964년 7월 9일)
▲ 판식 가구를 생산하는 함흥목재가공생산협동조합원들 ⓒ 노동신문(1964년 7월 9일)

석탄화학의 빛과 그림자

북한은 흥남의 석탄화학공업이 정상화되어 가면서 흥남에 해방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석탄화학산업을 일으켰다. 그것은 대규모 공장으로는 북한에만 있는 것으로 주체섬유라고 불린 비날론 생산공장(2.8 비날론 공장)이었다. 1961년에 본궁화학공장의 빈터에 세워졌다. 

비날론은 일본 교토제국대학 화학연구소에서 교수로 일하던 재일동포 과학자 리승기 박사가 1939년에 석탄화학에서 개발한 섬유로 화학적 명칭은 폴리비닐알콜계 섬유인데 일본에서는 비닐론으로 불리웠었다. 비날론 명칭은 김일성 수상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조상들이 베짜기를 할 때 날실과 들실을 넣던 것에 착안하여 민족 어감에 맞게 비날론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 "돌에서 나온 섬유"인 석탄계 화학섬유는 석유계의 나일론과 더불어 양대 합성섬유다. 1905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난 리승기 박사는 일본에서 투옥되기도 하였고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공학 대학의 학장을 맡았으나 기술적 성과에 냉담한 남쪽 학계에 비해 자신이 필요하다고 설득한 북한으로 1950년에 건너갔다. 북한에서는 섬유 공업이 많이 늘었으나 섬유원료 부족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있었기에 리승기의 석탄화학섬유 기술은 원유가 없는 북한으로서는 정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 비날론 섬유를 섞어 만든 편직물 시제품들 ⓒ 노동신문(1958년 6월 8일)
▲ 비날론 섬유를 섞어 만든 편직물 시제품들 ⓒ 노동신문(1958년 6월 8일)

비날론의 원료는 카바이드와 메탄올, 가성 소다, 유산 포르말린인데, 흥남엔 이 모든 것이 있었다. 있는 원료를 가지고 새로운 기술로 섬유를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먹는 문제(비료)와 입는 문제(섬유)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흥남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흥남이 북한 경제에 빛을 비추는 순간이 이런 때였으리라 생각한다. 1958년 3월 흥남 본궁공장 구내에서 연간 1만 톤 생산능력의 비날론 공장이 착공되었고 1960년 6월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고 1년만인 1961년 5월 6일에 준공되어 새로 "비날론 도시"가 세워졌다. 이 건설은 소련의 지원 없이 북한 자체 역량으로 건설하였다 하여 북한주민들의 자부심을 한껏 높였다. 비날론은 주체섬유로 불리웠다. 발명한 것도 조선사람이고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조선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날론 공장 건설을 통해 북한 정부는 그간 전후 복구를 위해 소련의 지원에 기댔던 경제정책에서 탈피하여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정책을 주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실 소련이 1960년을 전후하여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를 삭감한 것도 배경에 있어, 북한은 자력으로 경제를 건설하는 원칙에 서서 국민들의 충성심을 유발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천리마 운동, 천리마 작업반 운동 같은 대중운동이 195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이제 1년 만에 비날론 공장이 들어선 것으로 "비날론 속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북한의 여러 [속도전]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1967년까지 비날론 생산시설은 연간 3만 톤 생산능력으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건설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공사를 대충 했기때문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외부세계에 있는데, 북한에서는 그런 측면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과 함께 기술자,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건설 방법을 찾아가는 기술혁신을 추구한 "현장주의"의 공헌이 컸다고 한다. 

▲ 건설중인 흥남 본궁의 비날론 공장 ⓒ 노동신문(1961년 4월 3일)
▲ 건설중인 흥남 본궁의 비날론 공장 ⓒ 노동신문(1961년 4월 3일)
▲ 비날론 공장 준공식 ⓒ 노동신문(1961년 5월 7일)
▲ 비날론 공장 준공식 ⓒ 노동신문(1961년 5월 7일)
▲ 처음으로 생산된 비날론을 안고 기뻐하는 리승기 박사와 노동자들 ⓒ 노동신문(1961년 8월 27일)
▲ 처음으로 생산된 비날론을 안고 기뻐하는 리승기 박사와 노동자들 ⓒ 노동신문(1961년 8월 27일)

비날론 생산의 성공으로 흥남은 주체섬유와 주체비료를 생산하여 공급하는 제일 중요한 공업기지로 되었다. 흥남은 북한공업의 빛이 되었다. 대단위 기업집단이었던 흥남지구의 특성을 배경으로 1973년에 흥남비료연합기업소와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조직되었다. 북한의 연합기업소 조직의 효시이다. 이후 1974년에 김책제철연합기업소, 황해제철연합기업소, 강선제강연합기업소 등이 잇달아 조직되었는데 법적 체계를 가진 것은 1984년 정무원 결정 때부터다. 여하튼 흥남의 기업은 북한 기업조직의 선두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비날론 섬유의 장점이 천연면과 비슷하고 질기며 흡수성이 강하며 불에 잘 녹지 않는 점이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옷감으로서 착색성이 좋지 않아 염료가 빠져나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옷감으로서는 혼방 원료로 주로 쓰였고 단독으로는 작업복, 텐트, 어망 등으로 쓰였다. 옷감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좀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생산과정에서 전력을 많이 소비한다는 점이었다. 전력이 풍부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전력이 부족해지면 생산에 바로 타격을 받는 구조였다. 석탄화학에서 성공하였기때문에 품질면에서 경쟁력이 있던 석유화학제품 생산으로 가지않았던 점은 북한 화학공업에 그림자가 되었다. 전기에 목을 매달 수 밖에 없고 대형 장치산업인 석탄화학의 구조적 문제점은 후에 북한 산업의 부담으로 되었다. 

그래도 북한 정부는 비날론 공업화의 성공에 힘입어 1980년대 순천에 연산 10만 톤 규모의 비날론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는 등 주체섬유 비날론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결국 1995년 북한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전력생산이 급격히 감소하였기 때문에 흥남의 2.8비날론 공장은 가동을 멈추었다. 재가동된 것은 16년이 지난 2010년 3월이었다. 100억 달러를 들여 건설했다는 순천비날론 공장은 해체되었다. 2.8비날론 공장은 비날론 섬유는 물론, 폴리비닐알콜과 폴리초산비닐, 염화비닐 등 중간제품을 더 생산하게 되었다. 염화비닐은 PVC 수지로 그릇, 장화, 상하수도와, 호스 등 각종 공업제품의 원료이다. 

비날론은 섬유로서보다는 중간제품의 효용성으로 그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국가경제발전전략(2016-2020년)에는 주체철과 주체비료는 있지만 주체섬유 표현은 없다. "2.8비날론연합기업소에 메탄올에 의한 초산생산공정을 꾸리고 비날론 중간체를 위주로 생산하도록 한다." "2.8비날론연합기업소에 이미  꾸려진 가성소다생산공정을 격막법에 의한 생산공정으로 개건한다."라는 두 개의 문장만 있다. 메탄올에 의한 초산생산공정은 탄소하나화학공업이다. 

북한은 오랜동안 전기석탄화학을 유지해왔는데 이제 전기를 대폭 줄인 갈탄가스화에 의한 메탄올 생산이라는 탄소하나화학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게 살길이라고 본 것 같다. 비날론생산은 지금도 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변하였다. 비날론 섬유보다는 중간제품을 가지고 다른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석탄화학의 빛이 그림자가 되었다가 이제 다시 탄소하나 기술로 그림자를 벗어나 빛을 내려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다음 하편에서는 흥남공업의 미래와 남북협력 구상에 대해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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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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