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上)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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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上)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두만강은 국제성(国際性)이 흐르는 강
  • 2020.10.14 10: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구글어스로 본 라선지구와 라선시
▲구글어스로 본 라선지구와 라선시
▲라선시 라선극장에서 전시한 유물전에서. 필자촬영(2017년)
▲라선시 라선극장에서 전시한 유물전에서. 필자촬영(2017년)

한반도의 어느 하천도 수많은 역사를 품고 흘러왔지만, 그중에서도 두만강은 참 애틋한 느낌이 드는 강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두만강 하류 지역은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신석기시대 유물인 흑요석 활촉이 출토되기도 했다. 흑요석은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화산지역에서만 나는 것으로 그 강력한 절삭력으로 인해 우수한 무기와 생활 도구로 쓰였고 중요한 교역 물품이기도 했다.  

역사시대에 들어 두만강은 고구려 발해 영토의 중심부에 있는 강이었지만, 어느덧 우리 민족의 변경이 되고 국경을 가르는 강이 되었다. 반도로 줄어든 땅에서 민족이 웅크리고 있을 때, 두만강은 여진족(만주족)의 터전이 되었고 그래서 만주에서 청나라를 일으킨 그들의 고향이 되어있기도 하다. 

청나라 건국 이야기를 담은 <만주실록>에는 두만강을 금, 원, 명나라 때 호칭인 "아이후 비라"로 적고 있는데 이는 주로 두만강 상류를 일컫는 말이고 두만강 중하류는 투먼쟝(土門江、図們江、豆満江)으로 불렸다. 투먼의 만주어 원래 이름은 투먼서키연(土門色禽)인데 이 뜻은 "萬水之源"(모든 물의 근원)이라 한다. 두만강의 상류에 지류가 하도 많아 본류의 시원을 책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이 많은 지류가 하나의 강으로 모이기에 붙여진 여진어 이름이 후에 강의 본류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조선 시대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만강에 대해 "여진어로 일만(一萬)을 두만(豆満)이라하는데 많은 물이 여기에 이르러 합쳐지니 이에 이름하였다"고 쓰여있다. 중국 쪽에서는 투먼쟝(図們江)이, 조선 쪽에서는 두만강(豆満江)이 주로 쓰였다. 그런데 1712년에 청나라 총관 목극등이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알린다고 적은 것에 대해, 청나라에서는 토문=도문=두만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이후 근 200년간 두만강과 토문강이 다른 강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간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면서 1880년대에 국경회담이 다시 열렸으나 결렬되었다.

그러다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후에 1909년에 청나라와 맺은 <간도협약>에서 두만강의 원류를 백두산 남쪽으로 흐르는 지류인 석을수로 정하여 백두산과 간도지역(지금의 중국 연변지역)을 통째로 청나라 영역으로 인정했다. 해방후 1962년에 북한과 중국이 국경조약(조중변계조약)을 맺고 두만강의 원류를 석을수 북쪽에 있는 홍토수로 변경하고 백두산 천지를 조선측이 좀 많게 나누었으니 북한이 백두산과 천지를 반이라도 회복한 셈이다.

두만강의 이름이 두만강인 것은 한자어가 콩 두(豆)에 가득할 만(満)자라 그 동네에 콩이 많아서 그리 이름 붙었나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어원이 여진어였다. 그래도 콩이 많은 지역이라 두만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사실 두만강변에는 콩이 많다. 장 담그는 콩의 원산지가 만주-한반도북부 지역이었기에 고구려 시대에 콩된장이 나왔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려장(高麗醤)으로 표기하고 고구려 발음은 "미소"였기에 고려 시대까지 된장을 "密祖(밀조; 중국발음으로 미주)"로 말한다고 송나라때 고려를 다녀간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에 나온다. "메주"가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다. 일본에서 된장을 뜻하는 "미소"가 사실 고구려말인데, 고구려가 전해준 된장(고려장)을 고구려인이 미소(美蘇,未醤)라 불렀다는 10세기 기록(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이 전해진다. 만주족의 언어에 된장을 "미순"이라 하는 것을 보면 만주-한반도-일본의 콩된장문화는 고구려어 "미소"로 연결되어있다고 하겠다.

된장을 일본에 전해준 고구려와 후의 발해가 사용한 뱃길(일본도日本道)은 두만강하구 지역 또는 청진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중국 땅인 두만강변 훈춘(琿春) 또는 청진이 발해 시대 동경용원부(책성부)였고 여기서 바다건너 일본으로 향했다. 결빙기에는 부동항인 청진이, 봄-가을에는 두만강하구 지역이 출발-도착지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두만강 하류 지역은 10세기에 발해가 멸망한 후 변경지역이 되었고 고려시대엔 여진(동여진)인들이 해적활동을 하는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열었던 동해항로가 여진 해적의 침탈 항로가 된 것이다. 여진 해적은 1018-19년에 동해를 건너 울릉도와 일본 큐슈까지 침탈하였다고 한다. 여진 해적이 귀향길에 경상도 해안을 침입했으나 고려 수군이 격퇴하고 일본인 남녀 259명을 구출하여 송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고려사>현종 10년(1019) 4월조) 1107년 고려 무장 윤관이 함흥 이북의 동여진을 정벌하여 여진 해적이 사라졌다고 하나 청진-두만강하구 지역을 출입구로 하는 동해의 국제 해상항로도 그와 함께 800여 년간 역사에서 사라졌다. 

두만강 지역에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조상이 경원-경흥에서,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조상이 회령-훈춘에서 살았다. 여진족 거주지역을 세력기반으로 성장해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의 조선왕조는 <여진족 콤플렉스>인지 함경도지역 사람들을 특히 차별하였다. 세조 때의 <이시애의 난>은 함경도 전체가 차별철폐를 요구하며 석 달 이상 봉기에 나선 조선 최대의 지방 봉기였다. 

그리고 조선과 여진은 두만강 지역을 두고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임진왜란 전인 1587-88년에 강 하구의 섬 녹둔도(현재는 러시아에 연륙해 있어 러시아령이 되었음)에서 두 차례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두만강 하구에 조산보를 설치하고 있었고 충무공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사 벼슬을 하였다. 조선 최고의 무장인 성웅 이순신의 군인 경력은 사실 두만강 하구 여진인들과 처음 전투한 1587년 9월 "녹둔도 사건"에서 당한 패전으로 시작되었다. 부족한 병력으로 여진과 잘 싸웠으나 결국 퇴각한 이순신은 패전의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그 후 1588년 1월 이순신의 조선군은 여진 정벌에 대성공을 거두고 이순신은 백의종군에서 사면되었다.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 1762년에 두만강 가 언덕에 <승전대비>를 세웠다. 철도역인 두만강역에서 서번포 호수를 끼고 두만강 하구 쪽으로 가면 언덕배기 산이 나오는데 이 언덕이 조산(造山)이다. 이 언덕에 승전대비가 있고, 승전대 건물이 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2019년에 도로가 포장되어 중국과 러시아 관광객이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정비되었다. 중국 관광객은 중국측 방천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건너 두만강역으로 들어오고, 러시아 관광객은 철도로 두만강역으로 들어와 차편으로 승전대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북-중-러 3국 관광의 중요코스로 될 것으로 보인다. 

▲ 승전대(2017년 필자 촬영)
▲ 승전대(2017년 필자 촬영)
▲두만강가의 승전대비(2017년 필자 촬영)
▲두만강가의 승전대비(2017년 필자 촬영)

이 두만강 하류 지역에 있는 북한의 경제특구인 도시가 라선시(羅先市)다. 원래 이름은 1993년에 설치한 북한 최초의 경제특구 <라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의 라진선봉시(羅津先鋒市)이고 그전에는 라진시와 선봉군(구 웅기군)이었다. 라진시는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조선북부-일본을 동해 루트로 직접 연결하기 위해 만든 라진항과 라진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도시로 성장한 곳이며, 선봉군은 일제시대까지 경흥군 웅기읍이었고 웅기항이 있었다.

8.15해방 직전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이 가장 먼저 한반도에 상륙한 곳이 웅기항이었는데, 북한은 조선인민군이 소련군과 함께 웅기를 해방하였다고 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1980년에 웅기군 이름을 선봉군으로 바꾸었다. 선봉군은 1959년에 김일성 수상의 웅기군 현지지도 때에 군 전체를 하나의 <군종합농장>으로 통합하여 농업-제조업-상업을 모두 종합농장이 관할하는 최초의 실험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위 협동소유제를 전인민소유제(국유제)로 전환하는 실험을 하였는데 40여년을 그렇게 운영하다가 라진선봉시의 선봉군이 2000년에 라선시 선봉지구로 변경되어 <군> 단위가 없어지면서 종합농장이 해체되고 농장체계의 변화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라선시가 위치한 두만강은 역사적으로 국제성이 흐르는 강이었다. 우리 민족과 여진족,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 각축을 벌인 곳이다. 이제 이 두만강을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하는 라선을 바라보며 근대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꿈꾸는 미래 국경도시 라선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 다음 호 라선을 바라보다(中)은 근대 이후 현재까지의 라선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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