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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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中)
압록강이 부르는 새 동북아 평화경제의 꿈
  • 2020.11.25 10: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압록강을 넘나든 근대의 신의주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이 만든 대륙지배 거점 도시

① 러일전쟁(1904-05) : 러시아와 일본의 동북아시아 패권 전쟁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압록강 도하 약도 (자료) 일어판 위키페디아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압록강 도하 약도 (자료) 일어판 위키페디아

소설 <강철군화(The Iron Heel)>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잭 런던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라는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대한제국에 왔다. 그는 당시 독자취재를 한 유일한 종군기자였는데 일본군에 두 번 간첩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일본 제1군을 따라 의주에서 압록강을 돌파하려는 일본군과 이를 막으려는 러시아군 사이의 <압록강전투 1904.4.30-5.1>을 목격하고 기록하였다. 후에 한국에서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된 책의 내용 중에는 일본군의 조직력, 공격전술, 은폐술, 강제수탈이 아닌 군량조달에 대한 평가, 조선인들의 건장한 체격과 나태함, 조선사회 탐관오리들의 착취에 대한 비평, 중국인들의 근면함에 대한 호평 등으로 이 책을 읽는 한국인들에겐 불편함이 적지 않다. 한반도가 제국주의 열국에 의해 농락당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살던 조선사람들의 복잡한 마음속을 잭 런던이 어찌 헤아릴 수 있었으랴. 

근대의 신의주를 알려면 러일전쟁과 만주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역사적 배경을 좀 설명하고자 한다. <만주(満洲)>는 원래 만주족의 민족 이름으로 어원은 불교의 문수(文殊)와 같다. 여진족으로 불리던 이들이 청나라를 일으킨 누루하치 시대에 <만주>로 자신들의 민족 이름을 바꾸었는데 후에 이들이 살던 땅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여 만주(満州)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하 글에서는 만주를 지역 개념으로 사용한다.

1900년 전후로 러시아는 중국 청나라로부터 만주에 대한 이권을 얻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동방정책, 남하정책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협력하여 청일전쟁(1894년)에서 이긴 일본이 중국의 요동반도를 가지는 것을 막았다(삼국간섭). 그 대가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시베리아철도 노선 중에 만주를 통과하는 <동청(東清)철도>를 1896년에 완공할 수 있었고 그 중심 도시로 하얼빈시를 건설하고 하얼빈에서 대련(大連:다롄), 여순(旅順;뤼순)에 이르는 <남만주철도>도 깔았다. 만주의 기본 간선 철도망은 러시아제국이 건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얼빈과 대련은 러시아인의 도시로, 여순항은 러시아 극동함대 주둔항으로 되었다. 러시아 극동함대는 겨울철에는 얼어붙는 블라디보스톡항을 피해 부동항인 여순항에 정박하였다. 다롄은 원래 만주어로 바다라는 의미였는데 1898년에 러시아 조계지로 되면서 Daliny(다리니:러시아어로 ‘먼 곳’이란 뜻)로 개칭되었다(이후 일본 관동주로 되어 1905년 大連으로 재개칭). 하얼빈과 대련에는 지금도 러시아제국시대 건축물들이 여럿 남아있다. 참고로 "하얼빈 맥주(하피)"는 1900년에 러시아가 설립한 중국 최초의 맥주이다. 1903년 독일이 설립한 칭따오 맥주보다 3년 빨랐다.

(지도) 러시아가 부설한 만주의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 (1901년) (자료) David Wolff [To the Harbin Station(1898-1914)]의 지도를 한국역사연구회 박준형의 번역지도(http://www.redian.org/archive/110769) 를 사용하여 지명과 방향표시 입력
▲러시아가 부설한 만주의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 (1901년) (자료) David Wolff [To the Harbin Station(1898-1914)]의 지도를 한국역사연구회 박준형의 번역지도(http://www.redian.org/archive/110769) 를 사용하여 지명과 방향표시 입력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하고 조선에는 고종이 아관파천(1896.2-1897.2,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면서 친러파 정권이 수립되는 등,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성공하는 것에 당황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1902년), 국가총력전으로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일본은 자신의 근대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조선을 꼭 장악하고자 했다. 일본엔 부족하고 조선엔 있는 필수자원의 대표 격은 쌀, 무연탄, 철, 금 이 네 가지였다. 쌀은 급증하는 일본내 도시노동자들에게 공급할 식량으로, 무연탄은 제국해군의 함대 연료와 도시철도, 공장의 연료로, 철은 기계 및 무기의 원료로, 그리고 금은 1897년부터 실시한 금본위제 정책에 필요한 화폐수단으로 필수였는데 일본에는 이것들이 모두 부족했다. 조선은 근대화에 필요한 자원들을 모두 갖고 있었지만, 이 자원들을 활용할 정치, 사회, 군사, 인적 능력을 미처 갖추지 못한 채 제국열강들의 수탈을 당한 셈이다. 만주 지역은 콩, 밀 등 곡물과 석탄, 철 산지로 조선과 함께 일본제국이 욕심을 낼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과 만주의 노동력 또한 일본제국이 필요로 한 중요 자원이었다.

러일전쟁이 수년에 걸친 장기전으로 흘렀다면 일본이 패했을 수도 있었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이 1904년 2월부터 일 년 반 동안 육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의주의 <압록강전투>에서 일본군은 러시아 수비대를 이틀 만에 격파하고 여순으로 진격했다. 이 방식은 10년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와 같았다. 중국으로 가는 육상 교통로이던 의주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두 번에 걸쳐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침공하는 길이 되었다.

일본군은 러시아가 부설한 광궤(1,524mm) 남만주철도를 군사물자 수송을 위해 일본 국내 철도기준인 협궤(1,067mm)로 궤도 폭을 좁히고 또한 안동-봉천 사이에 협궤 군용철도를 깔면서 진격했다. 

러일전쟁에 임했던 러시아는 한반도는 포기하고 만주 방어에만 주력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에 배신당한 셈이다. 그러나 여순항 함락(1905년 1월)과 봉천방어 실패(1905년 3월)에 이어 대마도해전(1905년 5월)에서도 발틱함대가 궤멸당하면서 러시아는 전의를 상실했고 결국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 1905년9월)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와 만주지역의 이권 분할(장춘이북 북만주-러시아, 장춘이남 남만주-일본)을 인정하고 배상금은 안 주는 것으로 합의하고 북만주지역(하얼빈)으로 철수했다. 대한제국이 의지했던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멀어져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러일전쟁에서 이겼으나 전쟁배상금을 받지 못한 일본은 청나라와 1905년 12월에 "일청간 만주에 관한 조약"을 맺고 남만주 철도 운영(여순-장춘)과 부설, 철도 부속지에 일본군 주둔, 철도연선 광산채굴권, 일본인 거류지(영구, 안동, 봉천) 설치, 압록강 중국측 삼림벌채 권한 등을 보장받았다. 이로부터 일본제국은 조선을 강점하고 남만주지역을 기반으로 만주지역 지배를 실현해갔다. 일본은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하여 철도를 통한 지배를 시작했는데, 만주의 철도궤도를 조선과 중국, 미국에서 통용되던 표준궤(1,435mm)로 채택하여 여순-장춘, 안동-봉천 구간을 표준궤 구간으로 다시 바꿈으로써 조선-만주 사이에 환적 없이 수송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② 신의주의 탄생 : <전쟁과 철도>가 만든 도시

러일전쟁 과정에서 서울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499km 경의선이 급조되었다. 의주가 아니라 의주 옆에 새로 신의주역을 만든 것은 만주의 안동으로 압록강 건너 바로 연결하는 지점에 역을 신설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신의주는 <전쟁과 철도>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신의주 - "새롭고 의로운 땅"은 일본제국의 관점에서 그러했다. 

1904년 2월에 일본은 <임시철도감부>를 대한제국 정부의 허락 없이 설치하고 경의선 공사를 서둘렀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3월에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50년간의 임대 조약을 맺고 일본에게 경의선 부설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어 6월 신의주에 임시철도감부 출장소가 설치되면서 1905년 1월 신의주역과 우체국이 개설되고 평양-신의주 간의 철도가 완성되었으며, 4월에 용산-신의주 간에 연락 운전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신의주가 근대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인데, 실제 준공은 1906년 3월이니 러일전쟁이 끝난 후다. 

▲ 1930년대 신의주역 (자료)인터넷
▲ 1930년대 신의주역 (자료)인터넷

경의선의 종착역으로 된 신의주는 일본이 철도를 통해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거점 도시로서 커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1909년에 신의주와 중국측 안동을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를 착공해 1911년 11월에 개통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만주는 강을 넘어 철도로 연결되었다. 압록강 철교(길이 944m)는 일본의 건설회사 하자마 구미(間組)가 건설했는데 중앙에 단선 철로를 놓고 양측에 2.6m 폭의 인도교를 배합한 철교였으며 배가 통과하도록 다리의 중앙 부분의 한 구간이 수평으로 90도 회전하는 독특한 개폐식으로 설계되었고 건설자가 잠수 케이지를 타고 물속으로 들어가 공사하는 신공법으로 교각을 세웠다. 개폐식 철교로 된 이유는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던 영국과 미국이 통상선박의 압록강 출입에 지장을 준다며 철교 부설을 반대했기에 배가 통과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철교는 후에 6.25전쟁중에 미군폭격기의 폭격으로 신의주쪽 철교 부분이 절단된 상태로 남아 지금은 <압록강단교>라는 유명관광지로 되었다. 신의주를 보기 위해 단동(안동)으로 가는 관광객이 한번은 걸어보는 다리이다. 신의주-안동 간의 철도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1943년에 기존의 압록강철교 옆에 제2압록강철교를 개통하였는데 복선 철로였다. 이 다리도 6.25 전쟁 중의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으나 후에 단선 철로와 단선 도로로 복구하여 <조중우의교>라는 이름으로 북-중 간 육상 물류의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다. 

▲압록강철교(현 압록강단교)의 교량 회전부분 (2018년 6월, 필자 촬영)
▲압록강철교(현 압록강단교)의 교량 회전부분 (2018년 6월, 필자 촬영)
▲(왼쪽)중국 단동에서 본 조중우의교와 (오른쪽)압록강단교 (2018년 6월, 필자 촬영)
▲(왼쪽)중국 단동에서 본 조중우의교와 (오른쪽)압록강단교 (2018년 6월, 필자 촬영)

압록강 철교로 조선-만주가 이어지면서 신의주는 대륙을 향한 현관도시가 되었다. 경의선의 종착역은 신의주이지만 만주로 가는 열차는 안동까지 연장 운행했다. 안동에서 남만주철도 열차에 접속하는 방식이었다. 만주로 가는 승객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역은 열차 접속에 시간이 걸리는 안동역이었다. 

▲중국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본 압록강철교 (자료)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만선산업의 인상] 1941년p.122
▲중국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본 압록강철교 (자료)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만선산업의 인상] 1941년p.122

③ 신의주의 성장 : 교통과 전력을 기반으로 상업도시와 공업도시로 성장

신의주는 교통편 정비와 더불어 일본, 조선과 만주 사이의 철도통과무역이 성장하고 상업과 금융업이 활발해지면서 상업도시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압록강변의 목재를 운반하여 가공하는 목재업과 용천평야의 쌀을 가공하는 정미업이 2대 산업으로 신의주에 자리 잡았다. 1919년에 일본의 오지제지(王子製紙) 조선공장이 신의주에서 펄프 생산을 시작했으며 신의주 정미소에서 정미한 쌀 브랜드 <평북미平北米>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아 성가가 높았다고 한다.

1923년 평안북도청이 의주에서 신의주로 옮기고 압록강 제방 증축을 하여 1928년에 기본적인 도시 정비를 완성하였다. 사설 시장으로 <신의주 미곡상 조합 시장>(조합원 33명, 41평, 2층 건물)과 <신의주 수산시장>(수산물 중개인 10명, 경매장 및 창고 등 111평)이 개설되었다. 공설시장으로는 의주거리시장과 신의주공설시장 두 곳이 일용품 거래를 담당했다. 이와 더불어 목재가공과 정미 산업 외에 인쇄, 철공, 양조, 신발, 의류, 수산가공 분야의 공장들이 들어섰다. 공장들이 많아지면서 신의주는 인구 약 4만 명 도시로 되었다. 그리고 1938년에는 5.2만 명, 해방 직전에는 7만 명에 가까운 인구에 달했다. 1938년 말 인구통계로 신의주에는 조선인 3만7천 명, 일본인 9천 명, 외국인(중국인) 6천 명이 거주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4대1 수준인 것으로 보아 일본인 비율이 무척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의주 경계 밖의 해안 제방 둑 근처에 3만여 명의 가난한 조선인들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신의주권의 인구는 실제로는 1938년에도 8만을 넘었다고 한다. 이들이 가난 속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삶을 살았다. 해방 후 신의주지역은 바로 10만을 헤아리는 인구 규모가 되었다.

한편, 신의주항도 러일전쟁 때부터 개발되어 1906년에 무역항으로 선정되었으나 화물수송이 철도를 중심으로 옮겨져 신의주항은 크게 번성하지는 못하였다. 

▲1929년 작성 신의주항 평면도 (자료) 조선총독부 내무국
▲1929년 작성 신의주항 평면도 (자료) 조선총독부 내무국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통합적인 지배를 하게 되면서 신의주는 <만선일체화(満鮮一如)>를 위한 경제거점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상징적인 시설이 압록강에 건설한 수풍(水豊)수력발전소다. 수풍댐은 당시 세계 최대의 댐(높이 106m, 너비900m)으로 유명하였는데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80km 상류에 건설되었다. 일본(조선총독부)이 설립한 조선압록강수력발전㈜와 만주국정부가 설립한 만주압록강수력발전㈜가 공동출자하여 수풍댐(중력식 콘크리트댐)을 1937년에 착공하여 1941년 9월에 제1호기(10만kW)가 송전을 시작했다. 1944년에는 발전능력 60만kW가 되어 조선과 만주에 절반씩 송전했다. 이렇게 생산한 전력을 중-조 사이에 반반으로 나누는 방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풍수력 건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일본질소) 재벌 총수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가 주도했다. 노구치는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한 경험을 바탕으로 수풍발전소 건설을 총지휘했다. 그는 조선압록강수력회사와 만주압록강수력회사 양쪽의 초대사장을 겸임했다. 발전기는 당시 세계 최대의 용량인 10만kW급 7기를 일본의 시바우라전기(芝浦電気:현 도시바)에 3기, 독일의 지멘스사에 4기 주문하였는데 2차세계대전 영향으로 지멘스사 발전기는 1기만 납품되어 시바우라전기가 추가로 2기를 납품했다. 그래서 당초 7기가 아닌 6기(60만kW)가 수풍발전소의 발전용량이 되었다. 발전기는 만주국용 50Hz와 조선용 60Hz 전용기와 겸용기로 구성되었다. 60만kW발전용량은 당시 미국의 후버댐에 이은 세계 두 번째의 수력발전규모로 일제하 한반도 전력 공급량의 42%를 차지하였다. 후일담이지만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수풍발전소의 지멘스사 발전기를 포함해 2기만 뜯어가고 일제 발전기 4기는 놔두었기 때문에 수풍발전소의 전력생산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44년 말까지 수풍댐 건설에는 댐 건설에 누계 1,289만 명, 발전소 시설 건설에 누계 199만 명, 도로건설에 200만 명 등으로 총계 약 2,500만 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 노동력은 주로 중국의 산동반도지역과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확보하였다. 신의주는 수풍발전소 건설을 통해 공업도시와 상업소비도시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런데 결과론이긴 하지만 수풍발전소는 대공방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건설되었다. 일본 입장에서 만선일체화가 영속할 것으로 보았으니 전투기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발전시설이 공중폭격에 취약한 곳에 있었고 설비가 위장되지 않아 6.25전쟁 시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1952년 6월 23일에 미군기의 집중 폭격을 받아 발전소 시설의 70%가 파괴되었다.

▲(왼쪽)일제시대 수풍발전소, (오른쪽)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수풍발전소(1952년 6월)
▲(왼쪽)일제시대 수풍발전소, (오른쪽)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수풍발전소(1952년 6월)

1930년대 말 수풍발전소의 전력을 이용한 공업지대가 신의주에 조성되면서 인조견펄프공장, 알코올공장, 제사공장 등이 들어섰다. 종연(鐘淵)방직(후의 가네보)이 신의주에 많은 갈(蘆草)을 원료로 해서 인조비단을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종연방직 신의주공장을 건설했는데 해방 후 북한에서 인조견을 주체섬유의 하나로 중시하였다. 무수(無水)알코올공장도 해방 후 북한의 알코올제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신의주의 무역도 활발해졌는데 만주와의 무역품목으로는 수출로는 주로 쌀, 수산물, 주류, 과일, 면직물, 인조비단, 고무신발, 종이, 목제품 등이었고, 수입으로는 주로 밤, 메밀, 콩류 등 잡곡, 양잠실, 석탄, 선철 등이었다. 

▲종연방직 신의주 공장 (자료) 신의주상공회의소 [신의주상공안내] 1939년
▲종연방직 신의주 공장 (자료) 신의주상공회의소 [신의주상공안내] 1939년
▲신의주 세관거리 모습 (자료) 신의주상공회의소 [신의주상공안내] 1939년
▲신의주 세관거리 모습 (자료) 신의주상공회의소 [신의주상공안내] 1939년

근대 신의주의 내면 : 조선사람들의 자의식 성장

일제시대 신의주의 변화 모습을 물질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 문명발달사로 설명해도 그다지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신의주는 조선의 신의주다. 조선사람의 변화와 발전을 언급하지 않고 물질토대의 변화발전만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신의주의 물질문명과 경제력 성장이 조선사람들에게 얼마나 분배되고 축적되었는가가 중요한 척도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신의주의 근대문명발달을 재검토하는 것이 앞으로 과제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자의식 형성에 중요한 교육체계에 대한 검토도 필요한데 신의주에는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이 없었고 중등교육 8개 학교(남 5, 여3) 정도가 있었다. 그중 실업계 학교가 공립상업학교와 공립직업학교였다. 1938년의 상황이긴 하지만 조선사람들의 향학열이 높아 중등학교 지원자의 5분의 4가 낙방하여 학교 증설이 시급하였다고 한다(신의주상공안내 1939년판).

신의주 출신의 인물로는 태항산 조선의용대의 최봉원 선생(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같은 독립운동가도 있고 기독교에서는 사회운동의 원로 함석헌 선생(용천 출신)을 빼놓을 수 없으며, 신의주에서 목회활동을 한 한경직 목사(평남 평원군 출신)도 중요하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은 권투의 영웅 4전5기 홍수환 선수인데 그도 신의주 출신 2세다. 홍수환의 집안은 신의주에서 기독교를 신봉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경직 전도사가 섬기던 <신의주 제2 교회>에 다녔고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여기서는 체육계의 신화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생을 언급하고 싶다. 손기정 선생은 1912년 8월 29일 신의주 남민포동에서 가난한 잡화상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는데 달리기만이 어떤 장애도 비용도 들지 않는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보통학교(초등학교) 월사금을 낼 돈이 없어서 열여섯 살에야 졸업을 했는데 달리기를 좋아하는 그에게 어머니가 "기정아, 그렇게 달리기가 좋으면 하려므나. 기왕 나섰으면 어떤 고통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하면서 달리기 신발을 사주셨다고 한다. 신의주상업학교에서 오라고 했지만,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노동판을 전전하다 19살 나이인 1931년에 조선 육상선수권 1500m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육상의 명문 서울의 양정고보(고등학교)로부터 입학권유를 받아 1932년 20살 나이에 입학하여 가난한 가운데 교사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달리기에 열중하였다. 체육교사 김수기 선생, 지리교사 김교신 선생이 계셔서 달릴 수 있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그 사이에 신의주 고향 집이 홍수로 떠내려가 학업을 포기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좋은 선배들이 그를 붙잡아주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대표로 출전할 자격을 얻을 때까지 4년간 손기정은 출전한 모든 마라톤 대회의 우승을 휩쓴 무적의 강자가 되었다. 일본은 올림픽 마라톤에 배정된 3장 티켓에 일본인을 두 명 이상 출전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예선에서 1, 2 등을 한 손기정과 남승룡에 일본인 2명을 포함시켜 베를린에서 최종 선발전을 한다는 꼼수까지 부렸다. 손기정과 남승룡이 베를린으로 가는 철도가 신의주역을 통과할 때 한밤중에도 신의주의 군중들이 신의주역으로 몰려 손기정의 승리를 빌었다. 스포츠가 사람들의 환희와 열망을 끌어올리는 힘인 것을 손기정은 절감하였다. 손기정의 어머니와 가족은 압록강 너머 안동에서 손기정을 만났다. 안동역에서 국제열차로 연결하기 위해 정차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올림픽신기록으로 또한 마지막 100m를 12초로 골인하여 우승한 이야기와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생략한다. 남승룡은 3위를 하였다. 한반도가 시쳇말로 난리가 났다. 손기정은 귀국하여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일본 경관과 사복형사에게 붙잡혀 범인 취급받듯이 끌려나갔다. 일본은 손기정의 우승 쾌거가 조선민족의 민족감정에 불을 지펴 반일 시위와 독립운동으로 확산될 것을 걱정했다. 우승축하연도 없었다. 몇 달 뒤 간단한 축하자리에서도 손기정은 일본말로 인사해야 했고 통역이 조선말로 간단히 통역했다고 한다.

신의주 출신의 가난했던 조선인 손기정을 일본제국이 어떻게 대하였고 동포들이 어떻게 그를 대하였는가를 보면 일본의 조선통치가 정신문명적으로는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내걸었던 오족협화(五族協和) 이데올로기는 허구였다. 고대부터 역사상 성공했던 제국들은 그나마 각 민족의 자치를 인정한 경우였는데, 일본은 1920-30년대초반에 조선에서 소위 <문화통치>라는 걸 하다가 30년대 후반부터 군국주의로 다시 치달으면서 민족의 독립은 물론 자치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신의주는 일본제국의 <전쟁과 철도>로 압록강변 빈 땅에 만들어진 도시였지만 거기에 모여든 조선인들은 노동과 장사로 생활의 밑천을 만들어보려는 애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원래 있던 터전을 떠나 도시에서 방랑하는 이들에게 유일신 기독교가 힘이 되기도 했다.  신의주는 일제시대 기독교가 융성한 곳이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신의주를 "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생각하고 기독교적인 새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신의주의 경제성장에서 농상공업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등장했다. 어느 정도 성공한 이들과 여전히 힘든 이들을 민족주의가 묶었지만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나누었다. 일본이 물러난 해방 후에 협력할 수 있었던 기회를 버리고 대립으로 가게 된 것은 또 다른 외세인 기독교의 미국과 공산주의의 소련이라는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족의 미래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자의식은 비록 해방 후 남북간에 전쟁으로 치달았어도 결코 외세의 꼭두각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남과 북의 백성들에게 공통된 점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손기정 선생의 눈빛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사진) 1936년 10월 8일 여의도 비행장 귀국직후 경찰에 끌려가는 손기정 선수(자료) 데라시마 젠이치 [손기정 평전] p65
(사진) 1936년 10월 8일 여의도 비행장 귀국직후 경찰에 끌려가는 손기정 선수(자료) 데라시마 젠이치 [손기정 평전] p65

 

※ 다음호 신의주를 바라보다(下)는 해방후 신의주의 변화와 발전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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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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