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下-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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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下-2)
압록강이 부르는 새 동북아 평화경제의 꿈
  • 2020.12.16 09:3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전쟁후 신의주 복구 : 백성들의 생활력에 소련과 중국이 지원, 귀국 재일동포도 한 몫

전쟁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든 그 전쟁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인 것은 어느 때 어느 땅에서나 마찬가지였듯이 남한도 북한도 그러했다. 그런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신의주를 다시 일으킨 기초력은 살아남은 신의주 시민들의 "생활력"이었다. 그 힘이 있어서 북한은 전쟁 후 "사회주의 기적"으로 일컬어진 복구를 이룰 수 있었다. 

방직공장, 제지공장, 펄프공장, 고무공장 등이 곧바로 복구되었고 교원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 백화점, 영화관, 호텔, 신의주역사, 병원, 정부청사 등 시설들이 복구되었다. 

▲ (왼쪽) 복구된 신의주영화관 (노동신문 1954년 1월 23일) (오른쪽) 신의주펄프공장의 종이생산 모습 (노동신문 1954년 6월 27일)
▲ (왼쪽) 복구된 신의주영화관 (노동신문 1954년 1월 23일) (오른쪽) 신의주펄프공장의 종이생산 모습 (노동신문 1954년 6월 27일)
▲ (왼쪽) 공부하는 신의주고급중학교 학생들 (노동신문 1954년 9월 13일) (오른쪽) 새로 지어진 신의주역 건물 (노동신문 1955년 1월 8일)
▲ (왼쪽) 공부하는 신의주고급중학교 학생들 (노동신문 1954년 9월 13일) (오른쪽) 새로 지어진 신의주역 건물 (노동신문 1955년 1월 8일)
▲ 현재의 신의주역(신의주청년역)
▲ 현재의 신의주역(신의주청년역)

북한 내각이 1954년 6월에 승인한 <신의주시 재건 총기본계획>에는 신의주를 압록강을 낀 국경관문도시로서 문화적인 근대도시로 만든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일제시대에 형성된 기존 시가지를 유지하면서 신규 산업지역은 서남쪽에 조성하고, 남신의주에 화물역과 조차장을 두며 압록강에 화물 부두와 여객 부두를 신설하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이용한 뗏목 운송은 여전히 신의주 목재산업에서 중요했고 수상여객 운송도 중요했다. 

압록강변에 지대가 낮아 홍수피해가 잦은 신의주이지만 기존 시가지를 활용하면서 지대가 높은 남신의주 지역을 개발하는 방향과 육상 및 수상 운송을 병행 발전시키는 방향이 잡혔다고 할 수 있다. 1955년에 대홍수가 나서 신의주가 침수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대략 10년에 걸쳐 신의주는 전후 재건사업을 마쳤다. 1964년에는 평양-신의주간에 전기철도가 운행을 시작했다. 

▲ (왼쪽) 압록강뗏목이 신의주에 도착한 모습 (노동신문 1955년 4월 27일) (오른쪽) 신의주-용암포간을 운항하는 새 여객선 (노동신문 1955년 5월 31일)
▲ (왼쪽) 압록강뗏목이 신의주에 도착한 모습 (노동신문 1955년 4월 27일) (오른쪽) 신의주-용암포간을 운항하는 새 여객선 (노동신문 1955년 5월 31일)
▲ (왼쪽) 조성된 관문동 신의주청년공원 (노동신문 1963년 8월 15일) (오른쪽) 1964년에 완성된 신의주-평양간 전기철도화 (노동신문 1964년 8월 27일)
▲ (왼쪽) 조성된 관문동 신의주청년공원 (노동신문 1963년 8월 15일) (오른쪽) 1964년에 완성된 신의주-평양간 전기철도화 (노동신문 1964년 8월 27일)

전쟁 후 북한은 노동인력 부족이 심각했는데, 기술측면에서는 소련이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지원하였으며 중국인민지원군은 휴전후에 참전 병력의 약 20%인 25만 명 정도가 남아 각종 건설사업에 참여하였다. 소련의 기술 및 물자지원, 중국의 협력으로 복구한 대표적인 사업이 압록강철교와 수풍수력발전소 복구였다. 압록강철교(조중우의교)는 복선철도를 1955년에 단선철도와 단선도로로 복구하여 9월부터 신의주와 안동(단동)을 연결하는 국제정기버스가 운행을 개시했다. 그리고 수풍발전소 복구는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8년 8월에 70만kW 발전용량을 가지는 것으로 준공되었다. 전쟁 시기에 10만kW급 발전기 4기가 있었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1,2호기만 남았던 것을 소련이 지원하여 3-7호기 발전기 5기를 새로 제작하였고 댐 보수공사를 하였다. 발전시설은 모두 북한 측에 있고 중국과 북한이 절반씩 나누어 사용하는 방식이 계속 이어졌다.

▲ 복구 개건된 수풍수력발전소 (노동신문 1958년 8월 30일)
▲ 복구 개건된 수풍수력발전소 (노동신문 1958년 8월 30일)

북한에 남아있던 중국인민지원군 병력이 1958년말까지 모두 철수하면서 북한은 재일동포 귀국사업(1959년 12월 시작)으로 노동력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이 경상도 등 남한지역 출신인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귀국하는 것에 북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나선 것은 두 측면이 있었다. 일본에서 민족차별을 받으며 고생하는 동포들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낙원"을 만들어가자는 체제 선전적인 측면과 동시에 부족한 노동력에 대한 필요 측면이 있었다. 노동신문 1959년 12월 13일 자에는 신의주의 환영 태세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 행복을 같이 나누기 위하여 신의주시 영접위원회에서는 귀국하는 재일동포들이 제각기 자기의 희망과 기능에 따라 취업할 수 있도록 알선 대책도 충분히 세웠다. 신의주 시내에는 전기기계공장, 식료공장, 베아링공장과 특수고무생산협동조합, 농기구생산협동조합 등 수많은 공장과 생산협동조합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재일동포들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신의주시 인민생활편의협동조합 하나만 보아도 조합 내에는 양복 재단사, 염색 기술자, 시계 수리공, 미용사, 사진사 등 18개의 업종이 있다. 이 모든 업종들에서는 재일동포들을 그들의 희망에 따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미 시설과 작업장이 충분히 갖추어졌다." 

국경관문도시 신의주 : 바깥세상과의 통로, 중-조 친선으로 안동이 단동으로 개명

신의주는 재일동포들과 함께 중국계 화교들도 많이 거주하면서 국경관문도시 특유의 성격, 즉 국제거래를 통해 외제상품들이 거래되고 시장을 형성하며 정보가 유통되어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좀 아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되어갔다. 

북한(김일성 수상)과 중국(주은래 총리)은 1962년 10월에 <조중변계조약>을 맺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 황해의 국경선을 확정했다(1964년 3월에 발효). 1909년에 일본과 청나라가 멋대로 맺은 간도협약으로 중국영토로 들어가 있던 백두산 천지를 북한이 54.5% 되찾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공유하천으로 하였다. 신의주 근처 압록강 섬들 중에 중국 측에 인접한 황초평, 어적도, 신도 등이 북한영토인 것으로 조약에서 확정되었다. 특히 황초평에는 중국측 농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북한영토로 확정되면서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후에 1960년 후반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이 주은래 총리를 나라땅을 팔아먹은 자라고 비난한 일도 생겼다. 그러나 황초평은 조선시대부터 엄연한 조선영토로 신도에 주둔했던 조선군대를 위한 둔전이 설치되어있던 곳이다. 풀 초(草)자가 들어간 황초평을 1964년에 김일성 수상이 황금평으로 개명하였다. 그 풀이 갈대(蘆草)로서 인견을 생산하는 원료로 되었기에 황금 같은 땅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후술). 2010년에 황금평경제특구로 지정된 것으로 유명하다.

▲ 황금평 위치 (2011년 10월, 단동에서 필자 촬영)
▲ 황금평 위치 (2011년 10월, 단동에서 필자 촬영)

중국과 국경이 확정되고 1960년대 중반까지는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이전 시기로 북-중 간의 관계가 좋은 때였다. 중국은 1965년 1월부터 신의주의 맞은편 안동(安東)의 이름을 단동(丹東)으로 개명하였다. 동쪽을 편안케 한다는 뜻인 안동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설치한 안동도호부에서 유래한 이름이어서 북한으로서는 편치 않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1964년에 베트남 방문길에 중국에서 모택동을 만난 김일성이 요청해서 모택동이 편안 안(安)을 붉을 단(丹)으로 바꾸어 "중국과 북한이 동방의 사회주의 붉은 땅"이라는 뜻을 담으면서 음성적으로도 안과 단이 같은 계열로 크게 다르지 않은 묘책을 내었다는 설이 있다. 또는 주은래 총리가 개명했다는 설도 있다. 

신의주의 공업 재건 : 1980년대까지 사회주의를 자랑한 경공업도시

신의주에서는 전후재건 사업을 뛰어넘어 대규모 공장이 새로 신설되었다. 신의주는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현대 신의주의 대표공장이 된 대규모 공장으로는 신의주법랑철기공장, 신의주화장품공장, 신의주방직종합공장, 신의주화학섬유공장 등이 있다. 이중 신의주법랑철기공장은 북한에서 제일 큰 철제일용품 생산공장으로서 1954년에 조업을 시작했고 식기, 접시, 물병 등을 생산한다. 신의주화장품공장은 평양화장품공장과 쌍벽을 이루는 양대 화장품공장으로 현재까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 (왼쪽) 신의주법랑철기공장이 생산하는 도시락, 물병 (노동신문 1958년 7월 12일) (오른쪽)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하는 크림 (노동신문 1958년 7월 23일)
▲ (왼쪽) 신의주법랑철기공장이 생산하는 도시락, 물병 (노동신문 1958년 7월 12일) (오른쪽)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하는 크림 (노동신문 1958년 7월 23일)

신의주방직종합공장은 압록강변의 신의주제지(왕자제지)공장 터에 새로 건설되고 1959년에 1단계 조업을 개시하였다. 방직공장이 새로 건설되는 것과 동시에 방직 원료인 화학섬유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공장건설도 추진되었다. 사실 일제시대 종연(鐘淵)방직(후의 가네보) 산하의 신의주펄프공장 일본 기술자들이 황초평(후의 황금평)과 신도(후의 비단섬) 일대의 갈대(북한에서는 '갈'로 표기)를 원료로 한 인견(레이온) 천을 개발한 바 있는데 해방 후 신의주펄프공장이 이에 다시 도전하였다. 김일성 수상(당시)이 1956년 4월에 신의주펄프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갈대에서 옷감을 짜낼 연구를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김일성 수상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노동신문이 후에 전하였다. 

"공업발전에서 원료를 다른 나라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주 불안전한 일입니다. 자체로 원료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토대우에서 발전하는 공업만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직공업의 원료를 자체로 해결하도록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노동신문 1970년 2월 10일)

결국 신의주펄프공장은 130여 회의 실험 끝에 1958년 인견(레이온) 스프솜 생산에 성공하고 또 옥수수 짚을 원료로 하는 시험생산에도 성공했다. 김일성 수상은 이것이 방직공업발전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것으로 표창장을 보냈다. 국내원료에 의거한 방직공업발전이라는 북한의 기본방침에 맞는 개발이었기 때문이다. 1958년 8월에 내각이 <신의주 갈 인견 펄프, 스프, 방직, 염색 종합공장>을 건설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신의주방직종합공장 옆에 화학섬유 공장건설을 진행했다. 신의주화학섬유공장으로 이름 지어졌는데 연산 3만 톤 펄프(종이생산), 2만 톤 스프(솜생산), 6천만 미터의 직물을 생산하는 공장으로서 1961년에 1단계 완공, 1964년에 최종 완공되었다. 신의주방직공장에서는 흥남의 2.8비날론공장에서 1961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비날론과 신의주화학섬유공장에서 생산한 인견 화학섬유로 혼방 양복천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화학섬유 생산이 성공하면서 면을 생산하던 목화밭은 곡물생산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1985년에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은 신의주방직종합공장을 포괄하여 신의주화학섬유연합기업소로 개편되었다가 우여곡절을 거쳐 2006년에 다시 신의주화학섬유공장으로 환원되었다.

신의주에서 갈대를 원료로 생산하는 인견 스프솜과 흥남에서 석탄을 원료로 생산하는 비날론은 북한이 자랑하는 화학섬유로서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을 상징하는 주체섬유들로 불렸다. 후일 1992년에 노동신문의 신의주방직공장 탐방기사는 "지난 기간 공장에서 이룩된 가장 큰 성과는 주체섬유들인 비날론과 갈에서 뽑은 스프의 혼방에 성공함으로써 양복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질 좋은 천을 짤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노동신문 1992년 7월 19일). 북한이 중화학공업발전을 중심으로 잘 나가던 시기에 경공업과 농업도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구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근거가 된 성공 경험 중의 하나가 신의주의 방직공업이었다. 

▲ (왼쪽) 신의주법랑철기공장이 생산하는 도시락, 물병 (노동신문 1958년 7월 12일) (오른쪽)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하는 크림 (노동신문 1958년 7월 23일)
▲ (왼쪽) 신도(비단섬)의 갈대 (노동신문 1961년 8월 5일) (오른쪽) 1단계공사가 끝난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수상(노동신문 1961년 8월 14일)
▲ 신의주 방직공장과 화학섬유공장의 모형(노동신문 1958년 8월 30일)
▲ 신의주 방직공장과 화학섬유공장의 모형(노동신문 1958년 8월 30일)
▲ 신의주방직종합공장(신의주화학섬유공장) 건설 (노동신문 1961년 5월 10일)
▲ 신의주방직종합공장(신의주화학섬유공장) 건설 (노동신문 1961년 5월 10일)
▲ 신의주방직공장,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의 2020년 12월 현재모습, 우측 건물이 2019년에 개건현대화를 위해 철거됨 (구글어스, 2020년 12월 12일 접속)
▲ 신의주방직공장,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의 2020년 12월 현재모습, 우측 건물이 2019년에 개건현대화를 위해 철거됨 (구글어스, 2020년 12월 12일 접속)
▲ 신의주화학섬유공장(연합기업소)의 레이온 스프솜과 종이생산 (노동신문 1983년 8월 1일, 1992년 1월 16일)
▲ 신의주화학섬유공장(연합기업소)의 레이온 스프솜과 종이생산 (노동신문 1983년 8월 1일, 1992년 1월 16일)
▲ 신의주방직공장 (조선향토대백과)
▲ 신의주방직공장 (조선향토대백과)

신의주 개발의 새 단계 : 생활거주공간 남신의주 개발

신의주는 국경관문도시로서 또한 경공업도시로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1980년대까지는 사회주의체제 도시의 성공사례로서 성가를 유지했다.

80년대들어 신의주는 신의주 남쪽에 지대가 높은 남신의주 지역을 주로 개발하는 도시계획을 추진하였다. 농업생산지역이었던 남신의주는 신의주의 베드타운이자 신도시로서 문화후생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춘 다층주택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도시계획이론에 입각하여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고 적정한 자생구조를 갖는 도시-농촌 복합 생활권(1,2,3차 산업의 복합 생산-소비권)을 신의주에도 실현하고자 했다. 즉, 도시영역(공업지역과 생활권)과 농촌영역(농업생산지역)이 신의주에서 공생하는 형태였다. 현대 유럽의 도시 들에서 추구하는 "도시농업" 개념과 유사한 개념이다. 차이가 있다면 "공간의 효율성"보다는 “공간의 균등성”을 추구한 사회주의적 특성이 드러내는 비효율이겠다. 1985년에 김일성의 현지지도 때에 남신의지역에 상점, 병원, 유치원, 탁아소들을 배치하고 다층주택 총 3만 세대를 배치하는 대규모 도시계획을 추진하였다. 남신의주 도시계획 원칙은 생활거주지역에 맞게 "인민대중의 생활편의를 최대로 보장"하는 방향이었다고 하는데 이미 놓여있는 철로를 외곽으로 돌려 열차의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1992년 2월 남신의주에 1만 세대 집에 "새집들이"가 시작되었다. 7구획 20호동 1현관 1층 1호에 새집들이를 한 신의주방적기계공장 노동자 김인호 씨는 이렇게 소감을 말하였다. "층수도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편리하게 안성맞춤하게 되어있고 살림방 칸수도 여러 개나 되며 세면장, 위생실, 벽장 심지어 김치창고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은 다 2중창으로 되어있으며 방의 바깥벽면은 보온재로 미장하여 바람과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노동신문 1992년 5월 7일)

1980년대까지 신의주는 도시계획의 성공사례였다. 압록강 건너편 단동 사람들은 강가에 나와 맞은편 신의주의 현대적 건물들을 보며 또 유원지에서 북한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 10년후에 처지가 역전되리라고는 당시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남신의주지구의 문화주택 건설(노동신문 1983년 9월 14일)
▲ 남신의주지구의 문화주택 건설(노동신문 1983년 9월 14일)
▲ 남신의주 건설과 관련하여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주석 (노동신문 1985년 5월 11일)
▲ 남신의주 건설과 관련하여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주석 (노동신문 1985년 5월 11일)
▲ 새롭게 건설된 신의주시 (노동신문 1991년 6월 16일)
▲ 새롭게 건설된 신의주시 (노동신문 1991년 6월 16일)

 

※ 다음호 "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 (종결)는 신의주의 현재와 미래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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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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