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겨울을 나는 밀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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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겨울을 나는 밀싹처럼
  • 2022.01.28 22:00
  • by 이하연 (니나의 밀맡 공방장)
07:51

라이프인은 지난해 사회적경제 전문 미디어에서 소셜 솔루션 미디어로의 확장을 모색하며 한 해 동안 사회혁신, 지역문제, 기후위기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고 있는 개인과 조직을 취재해왔다. 2021년 범상치 않은 수다회 "범 내려온다">에 이어 2022년 올해도 <대환(換)장 수다회 "발상의 전환">이 진행됐다. 특히, 기후위기 섹션에는 김은정 소비자기후행동 상임대표, 방앗간컴퍼니 김민영 대표, 한국유기농업연구소 유병덕 부소장, 니나의 밀밭 이하연 공방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후위기 시대 우리는 어떤 먹거리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그리고 먹거리는 기후위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먹거리를 통해 기후위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이하연 공방장이 수다회에 이어 '니나의 밀맡' 이야기를 전해왔다. [편집자 주]

 

▲ 5월의 어느날 저녁무렵 '니나의 밀밭' 풍경 ⓒ니나의 밀밭
▲ 5월의 어느날 저녁무렵 '니나의 밀밭' 풍경 ⓒ니나의 밀밭

겨울의 논밭은 황량하다. 땅은 맨살을 드러낸 채 눈과 바람을 맞으며 겨울을 난다. 작물과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가 딸 페르세포네를 지하세계 하데스에게 빼앗겨 겨울이 생겼다는 그리스신화처럼 겨울의 땅은 헐벗은 채로 여신의 슬픔을 감내하는 중이다. 하지만 겨울철에도 초록으로 뒤덮인 대지가 있다. 밀, 보리 같은 겨울 작물을 심은 땅이다. 어쩌면 풍요를 끝내 배반할 수 없었던 여신의 의도된 실수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의 밀밭은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꿋꿋하게 녹색이다. 지난해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당신의 실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밀농사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오늘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고 있는 작은 밀밭의 농부이다.

2021년 맥류의 재배면적은 34,960ha였다고 한다. 전년에 비해 5,242ha가 줄어들었다. 농사를 지어도 팔리지 않고, 가격도 형편없다 보니 팔아봐야 생산비를 보전하기도 어려워 점점 짓지 않게 된다. 그 덕에 난감해진 건 나였다. 우리 지역엔 밀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다. 첫해 수확한 밀을 마을회관 마당에 깔아놓고 말리고 있자 동네 할머니들이 오가며 옛 추억에 잠기곤 하셨다. "하고미! 밀이구마잉. 옛날엔 다들 밀을 지어먹었지." 이제는 옛날옛날 옛적에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밀을 수확하는 철인 6월에 콤바인(수확기계)을 빌리려 하면 가을에만 기계를 사용하시는 벼 재배 농부님들께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 번번이 거절을 당하곤 했다. 그래서 밀과 비슷한 시기에 수확하는 보리농사 짓는 분들께 부탁을 해보자는 심산으로 알음알음하는 분들께 연락을 드렸는데 다들 보리농사를 그만 뒀다는 답과 함께 어렵다 하신 것이다. 열번째 쯤 안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을까, 정말 이제는 나도 그만둬야 하나 하는 절망과 기계 못 가진 설움이 더해져 눈물이 쏟아졌다. 다행히 열한 번째 시도에서 콤바인을 빌려 작년엔 2톤 정도의 밀을 수확할 수 있었지만 점점 더 농사가 어려워진다.  

나는 그 밀로 빵을 만든다. 우리밀의 자급률은 1% 정도 된다고 한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수많은 밀로 만든 가공품 중에 우리밀로 만든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커피나 아몬드같은 열대작물처럼 한때는 낯설었던 이국의 식물도 아닌데, 우리는 당연하게 수입된 밀을 먹는다. 물론 그 옛날 옛적에는 밀이 지금처럼 흔하게 먹는 음식은 아니었겠지만, 술을 빚는 누룩을 만들 때, 고추장을 만드는 엿질금을 띄울 때는 빠질 수 없는 주요 작물이었고, 집집마다 농사짓는 것이 자연스러운 토종 식량이었다. 하지만 쌀보다 더 저렴하고 새하얗고 쫄깃거리는 수입밀에 밀린 우리밀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생협에서나 볼 수 있는 구시대의 유물인 셈이다.  
 

▲ 니나의 밀밭에는 무당벌레가 살고 있다. ⓒ니나의 밀밭
▲ 니나의 밀밭에는 무당벌레가 살고 있다. ⓒ니나의 밀밭

우리밀은 수입밀에 비하면 비싸지만, 생산자인 농부 입장에서는 팔아봐야 돈이 안 되는 작물이라, 그저 돈으로 바꿔서 생산비도 안 나오는 일을 했다는 자괴감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자가소비하는 방향을 택했다. 더 가치 있게 먹어보려고 빵을 만들었고 그 빵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지역의 농부들이 함께 요리하는 부엌을 열었다. 어린이들에게 밀이 자라 빵이 되고 면이 되는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어 체험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줌에 몇백원이면 살 수 있는 파스타면을 뽑으려고 농사짓고 반죽하고 손으로 돌려 면을 뽑아 판매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수지타산이 안 맞는 일이었거니와 돈으로 교환될 수 없는 노동력의 무한 투입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또 자꾸만 농사가 뒷전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6년 동안 한 해도 쉼 없이 농사를 지었지만, 매번 엉망이다. 다들 잘하는 거나 하라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살라고, 민폐 좀 그만 끼치라고 애정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모든 것은 밀농사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어쩌다 얻은 묵은 밭 1천 평, 키 높이만큼 뒤덮은 온갖 덩굴, 풀들을 뽑아내고, 오래된 비닐을 걷어낸 곳에 심은 것이 어쩌다 밀이었을까. 농사엔 재주가 없는 도시 여자가 겁 없이 도전하기엔 가장 쉬운 농사라고 생각해버린 탓이었다. 가을에 심어 겨울을 이겨내고 풀보다 먼저 자라니 풀을 맬 필요도 없고 약을 칠 필요도 없으니 아무리 못해도 절반쯤은 수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밀을 수확하고 나면 작은 제분기로 밀가루를 빻아 빵을 만들고, 누룩을 디뎌 술을 빚는 삶을 살고 싶었다. 꿈은 따뜻했으나 현실은 차디찼다. 남들이 보기엔 다 쓸데없는 일이어서 먹고사니즘이 덜 절실한 이의 취미생활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 햇밀로 천연발효해 만든 깜빠뉴 ⓒ니나의 밀밭
▲ 햇밀로 천연발효해 만든 깜빠뉴 ⓒ니나의 밀밭
▲ 직접 농사짓고 반죽하고 손으로 돌려 뽑아 만든 파스타  ⓒ니나의 밀밭
▲ 직접 농사짓고 반죽하고 손으로 돌려 뽑아 만든 파스타  ⓒ니나의 밀밭

수많은 일들을 겪어낸 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질문을 던졌다. 왜 농사를 지어야 할까? 도무지 놓아지지 않는 이유를 계속 생각해야 했다. 농사를 짓는 일이 가끔은 눈부시게 행복할 때도 있다. 씨앗을 넣고 새싹이 툭툭 올라올 때, 마법처럼 이삭을 맺을 때도,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수염들의 물결을 볼 때도, 누가 보상해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만할 때가 있다. 그렇게 스스로 자라는 것들을 지켜보기만 하는 일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들에게도 소소한 도움이 필요한지라 농부의 일이 생긴다. 작물의 시간을 앞서서 무심한 듯 도움을 주면 될 일을 늘 한 두어 발작 뒤늦게 달려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일을 해내느라 고군분투하는 것이 농사를 못 짓는 하급 농부의 문제다.

몇 년간의 자괴감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사를 짓는다. 나의 롤 모델은 두월댁, 봉선댁, 내월댁, 이런 이름들을 가진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다. 도시에서 청춘을 다 소모하고 언젠가 내 삶의 끝에 빈곤한 독거노인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 무렵, 그 시골 할머니들의 삶에서 작은 희망 같은 길이 보였다. 도시의 삶이 어떻게든 돈을 벌어 노후를 지탱하는 돈을 마련해놓는 일이라면, 이곳의 삶은 돈을 좀 덜 벌어도 평생 몸이 고달파도 내 몸을 움직이면서 사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빈자리를 따라가며 내 방식대로 채워가는 일은 내가 꿈꾸는 이상과 내가 발디딘 현실에 가장 부합하는 방식이었다.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먼 미래처럼 보이겠지만, 한 마을 주민수 3~40명에 매년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보다 장례차를 보는 일이 더 많은 시골에서는 머지않아 사라질 이웃의 이야기다. 농촌 인구의 변화는 우리가 먹는 식량작물을 바꾸게 될 것이다. 거기에 기후변화로 인해 자연스러운 노지농사는 점점 더 불가능해져 가고 하우스나 스마트팜에 화석연료와 비료를 더해 인위적으로 키워내는 작물들이 더 일반적인 일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일반적인 일이 너무 당연한데, 나는 조금 비뚤어져서인지 덜 일반적인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은 것 같다. 봄의 딸기나 한여름의 토마토, 가을의 늙은 호박, 겨울의 묵나물, 전래동화처럼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남은 그 계절의 작물들을 먹고 싶다. 늦지 않았다면, 혹은 이미 늦었다 해도 내 앞에 놓인 징검다리를 한발 한발 느리게 건너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퐁당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하기도 하면서.  

함께 만든 작은 가게는 작년 말에 문을 닫았고, 코로나는 함께 만들고 싶은 많은 일들을 사전 검열했다. 나도 모르게 주문처럼 '괜찮아'를 되뇌인다. 그걸 본 누군가가 괜찮지 않다는 말인 것 같다고 해서 곰곰히 또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실현되지 않은 꿈의 간격을 절망으로 채우고 싶지 않아서 이만큼만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토닥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남은 것도 쌓인 것도 없지만, 겨울을 나는 초록색 밀싹들처럼 자연스럽게 자라나 봄이 오면 함께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근 화제가 되었던 영화의 엔딩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함께 빵과 음식과 술을 나누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올해도 겨울잠을 자면서 봄을 기다리는 작은 농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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