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번역협동조합, 협동으로 '좋은 번역'과 '좋은 사회'를 고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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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번역협동조합, 협동으로 '좋은 번역'과 '좋은 사회'를 고민하다
최재직 번역협동조합 사무국장 인터뷰
  • 2022.09.07 12:00
  • by 이인경 객원기자
08:26

이인경 前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장이 라이프인 객원기자로 참여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사회적경제조직을 돋보기로 자세히 살펴보며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착한책가게
ⓒ착한책가게

"'번역협동조합 옮김'이라는 표기를 볼 때마다 설레요."

번역협동조합 최재직 사무국장이 최근 발간된 '데자르뎅 연대금고의 역사, 존재의 열정'(피에르-올리비에 마우 지음, 번역협동조합 옮김, 착한책가게 출판) 책 표지를 가리키며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 책은 캐나다 데자르뎅연구소가 후대를 위해 기록해 온 역사적인 사례를 번역하여 출간한 책이다. 최 사무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릴 만한 일반 대중서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사회적경제 분야 연구자와 운동가들에게는 필독서가 될 만한 책"이다. 번역협동조합은 매년 열리는 정기총회에서 연간계획으로 이 같은 사회적 활동을 결정한다. "조합원이 직접 참여하고 의사결정 과정이 아름답기 때문에 자부심이 더 크다"고 한다. 이밖에 '협동조합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외부는 없다: 코로나19를 살다', '기업 경영의 6가지 새로운 규칙' 등 여섯 권의 번역서를 출판했다. 이것이 번역협동조합이 사회적 존재와 가치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번역협동조합의 경영 원칙은 신뢰의 관계망을 확장하는 것이다. 좋은 번역을 고민하고 통·번역 서비스 품질을 향상하여 고객 만족을 높이고, 지역에서 '협동'의 네트워크를 통해 좋은 사회 만들기에 기여하자는 것이다.

최근 폭발적인 관심을 받은 '이상한 번호사 우영우'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며 해당 작품의 번역도 화제가 되었다. 드라마 영어 제목은 'Extraordinary Attorney Woo'. 'Extraordinary'는 '비범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원제의 '이상한'을 영단어 'Weird'나 'Strange'로 직역할 경우에는 영어권의 사람들에게 자폐인을 차별하는 의미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Extraordinary'로 번역한 것이라는 해석이 따른다. 또, 주인공 우 변호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사용했던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라는 말의 번역 자막은 KAYAK(카약), Noon(눈), ROTATOR(로테이터) 등의 단어를 선택해 말맛을 살리면서 대사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했다. 우 변호사의 인사법이 자폐인의 특성을 상징하므로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도록 번역한 것이다. 이처럼 번역가는 원작자의 의도와 단어의 발음, 높낮이에 숨겨진 맥락을 전달하며 법, 사회적 관습, 역사성과 문화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커뮤니케이터로서 역할을 한다.

한편, 그레고리 라바사가 저술한 '번역을 위한 변명'의 한국어판 출판사는 이 책의 소개에 앞서 '번역은 묵묵한 노동과 오랜 작업 시간에 비례해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직업'이라고 설명한다. 번역은 단순히 저자의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며, 번역가는 번역을 통해 작품을 새로운 책으로 거듭나게 한다. 동시에 번역가는 책 표지에 '옮긴이'라는 표기 하나로 남겨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통·번역 시장 규모는 2017년 기준 약 49조 원으로, 연간 7%씩 성장 중이다. 인공지능(AI)이 시장 규모의 확대를 이끌고 있으며, AI의 발전에 따라 사라질 직업으로 '인간 통·번역사'가 언급되기도 한다. 세계 150개 언어가 AI 기술에 기반하여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통·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계 번역이든 사람에 의한 번역이든, 좋은 번역과 오역률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치열하다. 기후위기, 인권, 문화적 다양성, 불평등 문제 등 세계적인 이슈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회의, 교류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좋은 번역의 필요성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

▲최재직 번역협동조합 사무국장. ⓒ번역협동조합
▲최재직 번역협동조합 사무국장. ⓒ번역협동조합

번역협동조합은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협동조합이라는 사회적경제 방식으로 찾고자 하는 통·번역사들의 자조조직이다. 지난 2013년 협동조합을 창립했고, 올해로 10년 차를 맞았다. 창립 초기 21명의 조합원이 참여했고, 현재는 50여 명의 조합원이 함께하며 13개 언어의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방법을 찾다가 협동조합을 알게 됐어요. 통·번역사들이 시장에 휘둘리지 않고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협동조합의 시작이었어요."

최 사무국장은 번역협동조합의 목표가 "통·번역을 하는 조합원들이 집중해서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하고 통·번역 서비스의 품질로 고객과 신뢰를 쌓아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때 조합원이 1백 명 가까이 되었지만 지금은 절반으로 줄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직접 참여로 총회를 구성하는데, 현재 규모가 당장의 조직 운영 역량으로 감당 가능한 규모라고 한다. 또, 번역협동조합은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를 가진 통·번역사들의 자조조직'이라는 정체성에 동의해야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일감이나 경제적 보상만을 바라는 조합원이 다수라면 협동조합으로서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번역협동조합은 설립 이후 경영 성적도 꾸준히 좋아지고 있다. 최 사무국장은 협동조합 설립 초기에 아이쿱생협에서 심화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작은 경제조직이 겪을 수밖에 없었을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또, 서대문 지역 안에서 만난 다양한 지역단체 활동가들의 도움과 연대, 8개 타 부문 협동조합과의 협동을 통해 조직의 신뢰도를 높이고 진정성을 인정받은 것이 성장의 동력이 됐다.

최 사무국장은 "매출 규모만 보면 전체 시장에서 아직 미미한 성과일 수 있어요. 하지만 통·번역 서비스 분야의 1호 협동조합이라는 기대를 충족하고, 내적으로는 조직의 의사결정 체계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고 원칙을 지키며 신뢰의 자산을 축적해 왔어요"며 "이제는 조합원들도 번역협동조합의 구성원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해 주고 있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프리랜서 협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가끔씩 우리에게 물어요. 프리랜서 조합원이 퇴사하면 고객이 이탈하거나, 일감의 배분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는 않냐는 것이죠." 최 사무국장은 번역협동조합의 사무국이 영업과 마케팅을 전담하고, 영업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나 일감을 사무국이 활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은 조직일수록 회계, 경영기획, 조직별 역할 분담 등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협동조합 설립 전 과정에서 배웠고 이를 철저하게 지켜나가고자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 '동네국제포럼' 웹자보. ⓒ번역협동조합
▲ '동네국제포럼' 웹자보. ⓒ번역협동조합

번역협동조합은 지역사회 안에서 협동과 연대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동네국제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조합의 창립 2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이래 다섯 차례 진행했으며, 번역협동조합이 경비의 절반을 내고 지역의 여러 단체와 협동조합이 일부를 부담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며 얻은 신뢰와 지원에 보답하고 번역협동조합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사회에 보탬이 되자는 취지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포럼을 개최할 수 없게 되자, 이를 대신하여 데자르뎅 연대금고에 관한 도서를 번역·출판했다. 조합의 수익 중 일정 금액을 정해 '동네국제포럼'이나 책자 발간 등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다. 이 같은 결정은 조합원 모두의 결의로 실행된다. 번역협동조합의 '협동 프로젝트'인 것이다.

"'좋은 번역'을 제공한다는 고객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지금 중요한 것은 조합원들이 통·번역에만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최 사무국장. 그는 사무국이 적절한 납기를 확보하고, 조합원이 제값 받고 일할 수 있게 하고, 조합원 각각이 가진 장단점을 고려해 일감을 배치하는 등의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두 번의 선거를 치르고 코로나19의 여파를 겪으면서, 지난해와 비교해 매출이 절반 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공공기관이 주요 고객인데 선거로 행사 등이 미뤄진 까닭이다. 국제회의 등 행사 일감이 하반기에 밀려든다고 해도 할 수 있는 만큼만 소화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최 사무국장은 "우리의 의지와 달리 시장 환경이 변해서 생기는 일이지만, 협동조합 경영의 장점은 적립금이 경영 위기에 대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라고 전했다. 이어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위한 경제조직이지만, 협동이라는 민주적인 조직 운영의 원칙이 지켜져야 지속가능성이 확보된다"며 "협동조합을 시작하려면 당장 매출이 없어도 1년은 견딜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하고, 조합의 사무를 전담할 수 있는 사무국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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