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캠페인과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Hylas and the Nym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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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 캠페인과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Hylas and the Nymphs)>
[미술로 보는 세상(4)] 조양익 (미술평론가, 대륙으로 가는 길 문화예술위원장)
  • 2018.04.06 17:22
  • by 라이프인

성폭력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MeToo) 캠페인이 전 세계 사회 각 부문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일탈 행위를 예술가적 기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불편한 세상이니 그 캠페인에 문제가 될 사람도 꽤 있을 수 있겠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 초에도 미국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걸린 발튀스(Balthus, 1908-2001)의 작품 <꿈꾸는 테레즈>의 철거를 요청하는 온라인 청원이 전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 서명운동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시각예술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의 사명은 전 시대와 문화에 걸친 뛰어난 작품들을 수집, 연구, 보존, 전시해 사람들을 창조성, 지식, 아이디어와 연결하는 것”이라며 작품을 철거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방침을 밝히며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오늘은 영국의 한 미술관에서 '미투'(#MeToo) 캠페인과 관련해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는 다른 행동을 취한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영국의 맨체스터 미술관은 미투 캠페인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인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의 <힐라스와 님프들(Hylas and the Nymphs)>을 일시 철거했다고 합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힐라스와 님프들 1896, 캔버스에 유채 132.1 × 197.5 cm, 영국 맨체스터 미술관 (사진출처 : wikimedia)

그림의 배경이 된 ‘힐라스(Hylas) 이야기’는 쓰자면 길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힐라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입니다. 얼마나 잘 생겼던지 헤라클레스가 마음에 들어 시동(侍童)으로 삼았습니다. 헤라클레스는 힐라스를 아르고 호 원정에도 데려갑니다. 힐라스는 도중에 들른 미시아 섬에서 물을 길어 샘에 갔다가, 그곳에서 그의 미모에 반한 샘의 님프들이 목을 감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납치를 당했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사라진 힐라스를 찾아 헤맸고, 그동안에 아르고 호는 섬을 떠나 헤라클레스는 원정에서도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납치당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맨체스터 미술관은 "이 작품은 여성의 신체를 '수동적으로 장식하는 형태' 혹은 '팜므 파탈'로 표현하고 있다"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판타지에 도전해보자"고 철거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어 "이 작품은 젠더, 인종, 성별, 계층 등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이 완전히 얽혀있는 세상에 존재한다."며 "예술작품들이 어떻게 더 현대적이고 적절한 방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철거당하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 (사진 출처 : 맨처스터 미술관 트위터)

워터하우스의 여성 이미지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워터하우스만의 문제는 아니니 사회 전반 그리고 예술계 전반을 보는 것이 좋겠죠? 19세기 중반 영국 사회 - 빅토리아 시대 - 는 산업혁명 이후, 신여성의 등장에 따른 정치, 사회적인 여성에 대한 시선과 매춘의 증가로 당대 문학과 사상, 미술 등에 ‘여성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의 체제였습니다. 여성성에 대한 관심도 그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엄격한 도덕주의의 이상, 엄격한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위해 피아노 다리조차 외설적이라고 여겨 덮개를 씌웠습니다. 당연히 이들이 생각하는 여성은 ‘수동적이고 바람직한 여성성’과 ‘요부적이고 타락한 여성성’ 두 가지로 범주화되었습니다. ‘수동적이고 바람직한 여성성’은 도덕적으로 고결했지만 ‘요부적이고 타락한 여성성’은 불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화가들은 이런 분류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라파엘 전파 이후의 영국 미술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여성 이미지의 재현이 풍부했습니다. 라파엘전파는 문학적인 여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수동적이고 가부장적인 여성성을 대변하는 도상들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860년대 이후 로제티 등은 초기 라파엘전파 여성 이미지와는 다른 요부적인 여성 이미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시켰습니다. 1880년대와 90년대에는 두 가지 여성 이미지들이 각기 반복되고 재현되었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워터하우스는 여성의 외모, 자세 등을 통해 당대 어떠한 화가의 여성 이미지보다 수동성이 강한 이미지에 장식성을 더한 작품을 제작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워터하우스는 팜므 파탈적인 여성 이미지들도 수동적인 틀 안에서 재현했습니다. 의미에 있어서는 여성의 치명적 힘을 강하게 전달하지만 외형은 전형적으로 빅토리아 시대 수동적이고 얌전한 소녀의 모습을 묘사하는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수동성은 여성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 재현하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보편적 틀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힐라스와 님프들>에 등장하는 님프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힐라스를 납치하기 직전 님프들의 모습이라기에는 어색한 수동적인 표정과 손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납치를 실행하려고 힐라스의 팔을 이끌고 있는 님프마저도 표정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나를 선택해주세요!’하는 표정입니다.

<힐라스와 님프들>이 걸려있던 자리에 붙은 관란객들의 의견 쪽지들(사진 출처 : 맨처스터 미술관 트위터)

 

맨체스터 미술관은 과거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주는 부정적인 효과에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워터하우스의 작품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적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화젯거리가 되었지만 반발도 있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입장과 비슷한 주장, 검열이라는 주장도 있었다고 합니다. 심하게 욕을 하는 쪽지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거부터 관람객의 의견을 듣는 과정을 또 다른 예술행위로 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맨체스터 시의회도 나섰습니다. 미술관 측도 "향후 미술관의 전시 방향에 대한 대화와 토론을 촉발하기 위해" 임시 철거한 것임을 밝혔습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워터하우스의 작품이 다시 걸렸습니다.

향후 좋은 해결 방법이 나올까요? 또 맨체스터 미술관의 문제제기에 대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을 것입니다. 워터하우스의 작품을 보고 나는 맨체스터 미술관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에서 감상한다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 분은 미술관의 철거에 동의하시나요?

마지막으로 워터하우스 작품 두 점과 작가 소개합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질투의 화신 키르케(Circe Invidiosa) 1892, 캔버스에 유채 180.7 × 87.4 cm,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미술관 (사진출처 : wikimedia)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의 요부 키르케(Circe)입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운디네 1872, 캔버스에 유채 25.4 x 20.32 cm, 개인소장 (사진출처 : wikimedia)

운디네는 낭만주의 시대 독일 작가인 푸케의 『물의 요정 이야기』에 등장하는 물의 정령입니다.

워터하우스는 고전주의적인 주제를 추구하면서도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당대의 이상적인 여인상을 추구한 화가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를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로제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헌트 (William Holman Hunt(1827-1910) 등이 라파엘전파를 만든 1848년에 워터하우스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워터하우스는 1849년 로마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화가로, 당시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학생 화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거죠. 1854년 영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미술을 공부하였고 1870년에 로열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로마에서나 런던에서나 그는 미술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고,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졌습니다.

초기 시절에는 로렌스 알마 타데마 (Lawrence Alma Tadema, 1836-1912)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그렸습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문학적인 알레고리를 즐겨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문학작품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워 그 자체로 감상자를 즐겁게 하지만 좀 더 이해하려면 빅토리아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나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인용해야 합니다.

그는 일생동안 커다란 화풍의 변화는 크게 겪지 않았으나 아름다운 장면을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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