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NA, 함께 밥 먹자⑤] 나나이가 준 교훈 '순간을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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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NA, 함께 밥 먹자⑤] 나나이가 준 교훈 '순간을 소중하게'
필리핀 '워라밸(work-life balance)'문화와 '13월의 월급'
  • 2020.02.20 12:13
  • by 공정희 (한양대학교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석사과정)
따갈로그어로 카이나(KAINA)는 '함께 밥 먹자'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가족을 식구(食口), 함께 밥 먹는 사람이라고 부르듯 필리핀에서도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일상적인 친밀감의 표현이다. 필리핀 소도시 나가(Naga City)에서는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필리핀의 취약계층 여성들을 나나이(Nanay, 어머니)라고 부르며 함께 한식당 '카이나'를 운영하고 있다. 한류 열풍이 한창인 필리핀에서 한식 보급을 수단으로 취약계층 여성들에게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카이나프로젝트>와 필리핀 개발협력분야의 현장 소식을 전한다.

며칠 동안 잠잠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하루 만에 확진자가 20명이나 발생하여 전체 확진자는 총50명이 넘었단다. 반면 상대적으로 방역이 허술할 것 같은 필리핀은 여전히 확진자가 3명뿐이다. (2월19일 기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도 눈에 띄게 적은 수다. 

이런 큰 차이에는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반 년 정도 필리핀에서 살다 보니 단편적으로 보이는 원인도 있다. 바로 '아플 때 대처하는 방식'이다. 물론 개인의 성향에 따른 차이도 분명히 있겠지만, '아파도 학교에는 가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거나 '회사에서 쓰러지더라도 일단 출근은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나눈 경험이 있다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나이(Nanay, 어머니)들은 종종 아플 때에도 가게에 나와 일을 하는 한국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과한 에어컨 바람 때문에 여름 감기가 들거나 (필리핀은 늘 여름이다) 현지 음식을 잘 못 먹어 탈이 나서 창백한 얼굴로 출근을 하는 파견학생을 보곤 처음에는 놀랐다. 아픈데 왜 일을 하러 나왔냐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극구 일손을 거드는 학생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아플 때는 쉬어야 한다며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렇지만 다른 학생도, 또 다른 학생도 아플 때 출근하는 것을 본 후엔 한국에서는 원래 아파도 일을 해야 하냐며 의아해 했다.

일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나나이들은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날에는 출근을 하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누군가 아파서 결근했을 경우 같은 양의 일을 더 적은 사람이 해내느라 힘이 들더라도 남아 있는 나나이들은 그것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카이나에서 일하면서 느낀 여러 가지 문화충격 중 하나였다. 상호간의 양해 속에 일보다는 구성원 각자의 행복이 우선되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와 배려가 전제되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는 일을 남발하거나 아픈 동료를 탓하지는 않았다.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지 않더라도 일은 잘 돌아갔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증세가 나타날 때까지 출근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나이들은 다시 한 번 놀랄 것이다. 만약 나나이들이 기존 확진자들과 같은 동선에 머물렀거나 조금이라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면 그들은 빠르게 병원을 찾거나 자가 격리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있어 '사후관리가 아닌 사전관리'를 잘했다고 평가 받는 필리핀의 전반적인 분위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근로자 중심의 사고가 일반적인 필리핀에는 특별한 보너스도 있다. 일명 '13월의 월급'이라 불리는 급여이다. 필리핀의 모든 고용주는 근로자들에게 연봉의 12분의1에 상당하는 금액을 12월에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크리스마스와 신년에 큰 의미를 두어 빈부의 정도와 상관없이 지출이 증가하는 시기에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제도이기도 하다. 휴직 등의 이유로 한 해 동안 실질적으로 받은 급여가 연봉에 미치지 못하는 근로자일지라도 실제로 받은 급여의 12분의1을 연말에 더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니 '문화'가 아니라 어느 사업장이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정'이다. '13월의 월급'을 알리는 광고에는 이 급여가 고용주들의 선택이 아닌 근로자의 권리임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명시되어 있다.

▲ '13월의 월급'을 안내한 공고문의 일부 캡쳐

카이나에서도 나나이들과 파견학생들이 모두 모여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기념하는 자리를 가졌다. 가난한 나나이들과 빠듯한 지원금으로 생활하는 파견학생들의 파티이니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로를 위한 소박한 선물도 준비했다. 도저히 선물을 준비할 수 없는 형편의 나나이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나나이들은 양해를 구하는 쪽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삶을 즐기는 것과 가난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별개의 개념이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취업난에 시달리면서 점점 인간관계가 협소해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메뉴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파티라고 해도 평소에 먹는 것과 다름없었던 그저 가벼운 저녁 한 끼였지만, 앞치마 대신 예쁜 옷을 차려입고 덥고 습한 바람이 부는 카이나 매장을 벗어나 조명이 반짝이는 식당에 모여 업무와는 상관없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늘 그렇듯 나나이들과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는 않았지만 온전히 서로의 이야기를 묻고 또 대답하는 시간은 정말 따뜻했다. 사진도 수백 장을 찍었다.

▲ 거의 매일 먹던 치킨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여행을 ‘어디로’ 떠나는지 보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유명한 말처럼, '무엇을' 먹는지 보다는 '누구와' 함께 먹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공정희

여럿이 함께였기에 오랜만에 안심하고 밤길을 걸었다. 나나이들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그 시간이 좋았다. 평소 거리를 걸을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괜찮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마냥 든든했다. 맞잡은 손은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때로는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그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해내고 인정받았을 때보다 더 오래도록 깊이 기억에 남는다. 나가에서 두 계절을 보내는 동안 온갖 희노애락을 분(分)단위로 느낀 에피소드가 넘치고,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만큼 즐거운 일도 많았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그저 같이 걷던 그 밤길이 특별히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그날따라 유난히 행복해했던 나나이들의 표정 때문일까, 순간순간의 행복에 집중하는 나나이들과 함께하며 희생보다는 상생을 추구하는 그들의 가치가 우리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파견학생들도 나나이들도 약속한 듯 바로 트라이시클(대중교통)을 타지 않았다. 헤어짐이 아쉬운 순간에는 조금 더 함께 걷는 것만큼 좋은 핑계가 없다. ⓒ공정희

 

공정희
몽골 파견을 시작으로 2013년부터 쭉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일했다. 주로 봉사자들과 현장 사이의 다리가 되어 가치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느낀 변화와 성장에 감동하여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현재 필리핀 '카이나'프로젝트에서 한양대학교 파견학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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