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 신년 칼럼] 우리는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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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 신년 칼럼] 우리는 갈 수 있다
[생명안전시민넷ㆍ라이프인 공동기획 _ 안전 칼럼] 김 훈 (작가,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 서울소방재난본부 명예소방관)
  • 2018.01.02 10:30
  • by 라이프인
김훈 작가는 지난해 출범한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를 기꺼이 수락했다. 안전사회를 위한 시민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이프인은 생명안전시민넷과 함께 김훈 작가의 신년 칼럼을 게재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더욱 안전한 사회로 한 걸음 더 내딛기를 소망해 본다. / 편집자 주 (사진출처 : KBS 스페셜 <세월호 특별기획> '3년, 세월의 시간' 2017.4.13)

지난해 성탄절 즈음에 충북 제천의 한 빌딩에 불이 나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대통령, 국무총리, 여당대표, 야당대표와 국회의원들이 현장으로 달려가서 지역소방관서장의 브리핑을 받고 유가족들의 손을 잡았다. 어떤 국회의원은 소방대원의 무능과 작전실패를 통렬히 비난했다. 그들은 모두 재발방지와 안전장치강화, 소방인력장비 보강을 역설했는데, 수십 년 동안 이와 같았다. TV들은 다투어 특집 좌담프로를 내보냈다. 객원교수, 겸임교수, 초빙교수들과 변호사, 전직국회의원, 시사평론가들이 TV에 나와서 소방대원의 실수를 조목조목 질타했다. 이것도, 수십 년 동안 이와 같았다. 온갖 옳고 정의로운 언설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재난은 계속 터져 나왔으니, 옳은 말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러니 말하기는 두렵고 수치스럽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되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영부인과 함께 이른 아침 청와대를 나섰다. 대통령의 차량대열은 이날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를 남쪽으로 질주했다. 대통령은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개통식을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금강휴게소에 들러서 「경부고속도로건설 순직자 위령탑」을 제막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착공한지 887일 만에 428km를 개통했다. 이틀에 평균 1km씩 전진하면서 수많은 교량과 터널, 인터체인지, 휴게소를 건설했다. 세계는 이 속도와 공격성에 경악했다. 이 공사에서 노동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노동자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전진했다. 금강휴게소의 위령탑은 이들의 넋을 위한 기념물이다. 위령탑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있다.

그들은 실로 조국근대화를 향한
민족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의 복지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의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고통을 잊을 것이랴…

1970년 6월 이은상

1970년에 나는 육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그때 1인당 국민소득은 남한이 286달러, 북한이 384달러였다. 남북이 모두 세계 최빈국이었지만, 북한이 훨씬 앞서있었다. 대통령의 강퍅한 표정과 메마른 어조에는 늘 분노와 조바심이 서려있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조국근대화’의 상징이며 견인차였고 ‘한강의 기적’의 서막이었다. 이 428km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척추간선(脊椎幹線)이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제가치와 사회문화적 변화를 유도했다. 노동자들은 죽어서 산업전사(産業戰士)가 되었고 사람의 목숨은 보상과 위령의 대상이 되었다. ‘선개통, 후보완’이 이 도로건설공사의 지도원리였다.
이 도로건설 과정에서 작동된 속도, 능률, 성과 지상주의, 공기단축을 통한 경비절감, 인명경시, 안전무시, 육탄돌격, 결사돌파의 행동방식은 그후 반세기동안 한국사회의 산업현장에 일관되게 적용되었고, 정부의 정책, 기업의 경영과 인간의 심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 근대화 과정의 저돌성이 지금도 날마다 거듭되는 대형사고의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한 곳을 오래동안 바라보지 못하고, 대상을 넓고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새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알을 품지 못하고, 미리 설정된 목표 앞에서 조바심치게 되었다. 위험은 사회의 심층구조와 인간심성의 저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창세기에 갓 태어난 오랑우탄처럼 새로운 불행 앞에서 갈팡질팡한다. 빤히 보이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날마다 무너지고, 부딪치고, 터지고, 떨어지고, 매몰되고, 불타고, 연기마시고, 바다에 빠지고, 강물에 빠지고, 죽고 다친다. 날마다 자빠진 그 자리에 다시 자빠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또 무너진다. 몇 해 전 태풍이 지나간 아침에, 사람이 만든 날림 건물들이 무너졌는데, 학교 마당 미류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는 끄덕없이 매달려있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까치가 그 둥지에서 사람의 마을을 향해서 짖고 있었다. 나는 인간인 것이 무안했다. 사고와 죽음은 일상화되어있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한탄하면서도 자신의 무사함을 다행으로 여긴다. 죽지 않은 것이 순전히 요행수라면 삶은 견딜 수 없이 허무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카메라기자들을 데리고 재래시장에 가서 떡볶이, 어묵, 순대를 집어먹고, 고등어를 주무르고, 배추값을 물어보고, 신발을 사신고, 영세상인들을 껴안고, 사진을 찍는다. 신문은 이것을 ‘민생행보’라고 쓴다.
그들의 민생행보를 전하는 TV화면에는 점포마다 전깃줄이 뒤엉켜있고, 가스배관이 보조난방기 옆을 지나가고, 프로판 개스통과 전기소켓 연탄화덕이 널려있다. 재래시장은 화재가 잦고, 불이 나면 금방 번진다. 불이 꺼지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다시 이 잿더미에 ‘민생행보‘를 나와서 울부짖는 상인의 등을 두드리며 사진을 찍는다. ‘민생행보‘가 다녀간 뒤에도 재래시장은 거듭거듭 불에 탔다.

얼마전 중국에 갔더니, 호텔 로비에 ‘안전은 장시간에, 사고는 순식간에’라는 표어가 붙어있었다. 좋은 말이어서 수첩에 적어왔다. 사고가 순식간에 터지면, 장기간의 안전은 물거품이 된다. 장기간의 안전이 쌓이지 않으면 사고는 매순간 터진다. 정부, 기업, 개인이 장기간 안전을 쌓지 않으면 사고는 일상화할 수밖에 없다. ‘장기간’과 ‘순식간’은 같은 말이다. 이제 고층화 밀집화 기능화가 피할 수 없는 생활의 조건이라면,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한 삶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층층이 모여살고 줄줄이 차를 몰고 다니는 사회에서 안전은 사람들의 연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남의 안전을 존중하는 것이 나의 안전이다.
금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된다고 한다. 이제 근대화와 한강의 기적이 가져온 야만의 유산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청산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대된 인간의 힘으로 한걸음씩, 천천히 갈 수 밖에 없다. 생명안전시민넷은 올해 그 첫걸음을 내딛는다. 길은 멀어도 벗은 많다. 우리는 갈 수 있다.

2018년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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