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스포텐] 맘충이 없는 나라,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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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스포텐] 맘충이 없는 나라, 체코
  • 2024.04.30 12:00
  • by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 에스텔

포포포 매거진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2019년에 창간한 매거진이다. 포포포 POPOPO는 connecting PeOple with POtential and POssibilities의 약자로 가능성, 그중에서도 엄마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아직 조명되지 않은 누군가의 잠재력과 서사를 발굴하고 함께 연대해 나가는 여정을 지면으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라이프인은 7개국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의 글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으로 프라하를 알게 되었다. 프라하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가는 이야기다. 드라마 연출자가 굳이 프라하를 배경으로 택한 이유는 "화려한 파리와 달리 빛바랜 느낌을 주는 프라하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주제와 잘 맞는 장소라고 생각했다"라고 언급했다. 프라하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였다. 파리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답고 오래되어 기품이 있는 도시. 유럽의 곳곳을 떠돌아도 가장 따스한 색감으로 기억에 남아있을 도시. 1년 전 우리는 프라하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가 프라하에 오게 된 것은 남편의 주재원 발령 때문이었다. 반년 동안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국제이사 준비를 했다. 남편은 사전 교육 일정으로 바쁘게 보내느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매일을 헤쳐 나갔다. 앞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주말부부로 지낼 것이 까마득했지만, 그 배경이 프라하라면, 그건 그대로 견딜 만한 일이 아닐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있었다. 우려를 표하는 주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엉엉 울더라도 프라하성의 야경을 보면서 울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상황 아닐까요?" 자조와 기대가 섞인 농담을 하곤 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지금도 마음이 힘들거나 한국이 그리울 때 프라하성의 구시가지 풍경을 보러 가곤 한다. 프라하성 스타벅스에는 반드시 한국인이 있다. 여행 온 사람들의 들뜬 마음과 빛나는 눈빛을 마주하면, 내가 누리는 이 평범함이 결코 평범함이 아님을 실감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올 수 있는 곳에 우리가 살고 있다.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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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아름답다. 주홍색 지붕과 상아색 페인트로 칠해진 벽, 오래된 돌길이 있고 아름다운 성당과 다리가 있다. 햇빛이 드는 날, 블타바강 너머로 보이는 프라하성과 성 비투스 성당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경은 프라하의 낭만을 완성해 준다. 그리고 작은 골목 골목마다 따뜻하고 조화로운 색감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프라하가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체코 사람들의 배려와 호의의 문화다. 처음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이삿짐이 들이닥쳤다. 여독의 피로를 풀지도 못하고 이삿짐을 정리하고 다음 날 남편은 다시 4시간 거리 체코의 소도시로 떠나야 했다. 정신없는 이틀이 지나고. 비로소 아이 둘과 홀로 남겨졌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까마득했지만, 사흘째에는 다 같이 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첫째는 여기서 태어나 처음 '트램'을 보았고 '트램'을 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도전이 시작되었다. 둘째를 유아차에 태우고 트램을 기다리는데, 우리 앞에 도착한 트램은 평소 예쁘다고 생각했던 프라하의 빨간색 올드트램이었다. 이때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출입문이 열리고 좁고 가파른 계단이 두세 개쯤 보였다. '아! 계단! 계단이 있네?' 그러니까 내게는 유모차에 탄 아이 하나와 걷는 아이 하나가 있다. 실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첫째는 우두커니 서있고, 둘째는 유아차에서 요지부동이었으며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뒤로 누군가 나타나 유아차를 통째로 번쩍 들어 트램 위로 올려 주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트램으로 타서 체코 할아버지에게 자리 양보를 받았고, 당황한 우리에게 트램에 타 있던 사람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따뜻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릴 때는 또 다른 분이 유모차를 내려주었고, 고작 두 정거장을 지나고 정류장에 내리는 동안 우리는 세 사람에게 배려와 양보를 받았다. 5분 남짓한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트에 들어가서도 유아차를 위해 문을 잡아주는 이가 있었고, 빵을 고르느라 아이들이 시간을 지체하여도 모두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천국인가?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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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키니 긴장이 풀렸다. 한숨을 내쉬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돌이켰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마트에 가는 것은 도전이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니 긴장되고 경직되었으나, 뜻밖의 친절에 긴장이 누그러지면서 울분 같은 것이 목구멍으로, 코로, 눈으로 솟구쳤다. 체코인들에겐 당연한 배려와 호의가 나를 자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지나치게 긴장했던 것, 필요 이상으로 방어적이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한국을 떠나던 날, 공항에서 있었던 일들이 가장 나를 슬프게 했다. 그때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홀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국내선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유아차에, 아이들의 애착 인형에, 이불에, 짐이 많았다. 두 아이를 챙기느라 겨울이었음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식은땀이 났다. 게다가 탑승 시간이 촉박했고, 영유아를 동반한 상태로 일반 승객과 섞여서 긴 줄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나 힘들던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그렇게 초조함이 극에 달한 상태로 긴장해 있다 보니, 앞사람의 신발을 유아차로 건드렸던 모양이었다.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휙 뒤돌아 "지금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하고 쏘아붙였다. 그때 무력한 마음이 들면서 내 안의 어떤 것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글쎄요, 제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제가 대체 뭘 하려고 이 피난길 같은 상황에 있는 걸까요.' 물론 내 잘못이긴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아이들 앞에서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적의를 드러내니 나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하얗게 질렸다. "보다시피 제가 급해서요!" 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와 출입국심사대로 달려갔다. 간신히 비행기를 타고, 아이들에게 좌석 벨트를 매어 주며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돌리니, 수치감과 모멸감이 밀려왔다. 엄마가 된 내 인생엔 없던 호의와 배려. 한국에선 바래서도, 가질 수도 없었던 사회적 존중감. 아이들이 자랄수록 매일 조금씩 마모되던 나의 자존감은 호의와 배려가 배격된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항에서의 일이 특별히 상징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내가 맘충일 것임을 확신하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자신이 반드시 피해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마땅히 굽신거리며 맘충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던 굴욕과 수치가 있는 곳에서 말이다.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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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엄마들의 삶도 녹록지 않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피곤한 것과 별개로 참 건강해 보인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자원이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 안전한 곳이라는 자원. 이는 치안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깔린 보호자와 어린이 친화적인 분위기를 포함한다. 프라하에서 느낀 사회적 분위기는 이런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당신은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와 보호자는 보호받아 마땅합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으니, 언제나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모두가 그런 눈빛으로 나와 아이들을 바라본다. 이날 이후로도 매일 프라하 곳곳에서 배려와 포용을 보았다. 마을마다 있는 작고 알찬 놀이터와 관공서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 놀이공간과 공존하는 식당과 카페. 둘째가 쇼핑몰 바닥에 누워 굴러다녀도 아이를 사랑스럽게 보며 옅은 웃음을 짓는 사람들. 설사 아이들이 소란하게 하더라도, 보호자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모습을 마주했다. 특히 그들이 아이를 향해 짓는 미소는 나를 안심하게 했다. 편안하게 했다. 마치 그 미소가 나와 아이들이 존재해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았다. '우리 여기 있어도 되는구나. 괜찮은 거구나' 하고 말이다. 물론 체코도 완벽한 사회는 아니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있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살아간다. 그러나 한국보다는 조금 더 약자에게 포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아이와 보호자를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기꺼이 공간을 내어놓는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 훨씬 잘 살지만, 체코는 공존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성숙한 사회를 가졌다. 우리가 체코에 머무는 몇 년간은 아이들이 따뜻한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낸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아무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지레 맘충이라 단정 짓지 않으며, 아이들은 낯선 이들의 비밀 윙크와 미소를 충분히 받으며 사회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였을, 우리였던 우리가 여전히 한국에 있다. 한국에서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겪을 거절감과 냉담함을 생각하니 슬퍼졌다.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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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나는 체코에서 인기가 많을까요? 여기서는 왜 사람들이 내게 잘 대해주는 거예요?"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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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라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할 첫째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아이의 옅은 미소에서 희미하게 차오르는 자신감을 보았다. 여기라면 자신이 보호받을 거라는 안심과 모두가 나에게 호의적일 거라는 자신감. 아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길을 건너려 하면 지나가던 차가 멈추고, 자신에게 먼저 건너라 손짓해 준다는 걸. 길을 지나가는 모두가 자신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는걸. 자신이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기꺼이 돕는 어른들이 있다는걸. 자신이 사회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체코에서 나와 아이는 더 이상 눈치 보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해도 됨을 매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처럼 상처 입은 나와 아이들이 다시금 세상에 마음을 열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아름답고 빛바랜 도시 프라하에서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두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간다. 세상의 따스한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마음껏 가지를 뻗어내어 곧고 길게 자라날 나와 아이들의 시간을 기대한다.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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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포 매거진 에디터 에스텔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 에스텔
빛바랜 도시 체코 프라하에 거주 중인 클래식을 사랑하고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는 맑눈광 아줌마. 첫 해외살이와 주중 독점육아가 버무러진 행복과 고통을 포포포 매거진과 블로그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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