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하고 고단한 국제협력개발 활동가의 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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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하고 고단한 국제협력개발 활동가의 길 ①
  • 2023.04.06 15:00
  • by 국제개발협력 NGO 캠프 이철용 대표

개발도상국, 거기에서도 빈민촌과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NPO, NGO 단체가 있다.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캠프'도 그중 하나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2006년 처음 필리핀으로 가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는 캠프 이철용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 국제개발의 어려운 현실을 들여다보고, 묵묵히 활동을 수행하는 그의 사명감을 글로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저는 필리핀에서 16년 차 국제개발 활동을 하는 사단법인 캠프의 이철용입니다. 제가 처음 필리핀에 오게 된 것은 지난 2006년입니다. 당시 저는 한국에서 장애인 관련 인터넷신문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폐간이 되었지만 '위드뉴스'라고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인터넷 신문이었습니다. 

 

장애인 운동의 한계에 부딪히며

필리핀 방문의 목적은 휴가였습니다. 당시 저는 건강이 아주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인터넷신문을 운영하는데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위드뉴스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을 넘어서 이동의 어려움이 있었던 장애인들에게 장애인 관련 생생한 현장들을 전하고 장애인 차별의 문제를 제기하며 변화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 때문에 기사뿐만 아니라 현장 영상을 함께 서비스하는 당시 다른 장애인언론과는 다른 매체였습니다. 매체를 시작하면서 당시 장애인 분야의 오마이뉴스와 같은 사회변혁과 인권에 기반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정신을 지키며 매체를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부분 장애인 언론은 정부나 장애인 관련 대형 단체 그리고 보조기 등 장애인 관련 사업을 하는 곳으로부터 광고를 받고 유지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광고를 받는 형태로 운영을 하게 되면 변혁을 위한 걸음은 한 발도 나갈 수 없기에 우리는 이런 광고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을 유지했습니다. 인터넷 언론이다 보니 사실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프라인 신문은 제작에 큰 비용이 들지만 인터넷 언론은 사이트만 구축하면 기자들 인건비가 가장 큰 것이었고 다른 비용은 제가 컴퓨터와 관련한 서버를 다루는 것 등 대부분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방법은 있습니다. 사실 제가 목사입니다. 그것도 군소 교단이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소속 목사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 학부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기에 사회적으로도 검증이 된 목사입니다. 요즘 하도 이상한 목사들, 교회들이 많다 보니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자괴감을 느끼지만 어떻든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교단의 목사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들이 기본적으로 가진 이웃사랑의 정신, 장애인을 지원하는 선교적 방향으로 매체를 운영하면 많은 교회들의 협력을 얻어서 운영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매체를 시작하며 '무엇이 진정한 선교인가?'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만약 매체의 이름에 선교라는 말을 넣고 교회의 내용을 집중하면 더 많은 후원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시각은 시혜적 접근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이것에 상처받은 많은 장애인이 교회로부터 떠나갔습니다. 근본적으로 장애인 차별을 해소하고자 하는 매체가 종교라는 테두리로 또 다른 차별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에서 기독교적 색채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한국교회의 인식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 쓰레기 매립장에서 마주한 나의 어린 시절

때문에 제한적인 몇몇 교회들을 기반으로 운영하다 보니 그 부담이 설립자인 제가 다 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여 년 동안 월급봉투는 물론이고 오히려 대출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이어지다 보니 그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당시 필리핀에 선교사로 있던 중학교 동창의 권유로 한 주간 필리핀의 마닐라 남쪽에 있는 민도르의 작은 리조트에 가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마음에 부담이 느껴졌습니다. 가난한 필리핀에서 휴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의 빈곤을 짧게라도 보고 싶어 친구의 사업지를 방문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마닐라의 빈민가 톤도 나보타스, 그곳의 한 쓰레기매립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을 봤습니다.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놀기도 하고 쓰레기를 줍기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제 마음에 하나님은 왜 나를 이곳에 보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은 방문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이 질문은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 과거가 겹치었습니다.

저는 올해 60살이 되었습니다. 서울의 가난한 동네인 옥수동 나지막한 산등성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님은 경북 울진 백암온천 출신이시고, 아버님은 이북 함경도 문천에서 한국전 당시 피난을 오셔서 부산에서 만나셨다고 합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3살 때 뇌졸중으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제 기억에는 집에 약 냄새가 많이 났다는 것뿐입니다. 당시 집이라고 했지만, 사과 상자의 나무를 대충 덧대어 집의 형태를 만들었고, 나중에 그곳에 루핑이라고 하는 아스팔트제를 비닐처럼 외벽으로 덧대던 그런 집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무허가 시 정부의 땅이었지요.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저와 저보다 3살 위의 형, 이렇게 3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생계를 위해서 평생을 금호동의 금남시장 길거리에서 노점상으로 떡을 생선을 팔며 고단한 삶을 사셨습니다. 제 주변의 친구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마치면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지금의 동호대교 옥수역 아래에는 당시 많은 농 공장, 상 공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아교를 녹이고 가구를 만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 친구는 이곳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공부가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원래 교사셨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는 장애인을 가르치셨다는 기억만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중학교에 가야 하므로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나서는 매일 학교를 가기 전후로 교회에 들러 기도실에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중학교에 보내달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교회의 전도사님이 저를 불러서 중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미국의 대학생이 결연해서 도와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장이 아닌 중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도와준 기관은 당시 양친회라는 곳인데 사무실이 남영동이었습니다. 이 단체가 지금의 '플랜코리아'입니다. 정기적으로 집 앞에서 흑백사진을 찍고 편지를 써서 옥수동에서 남영동까지 걸어가 지원금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 이후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에 도움을 줘야 하기에 은행원이 되기 위해 덕수상고를 진학하고 서울장신대학교를 거쳐 목사가 되었습니다.

쓰레기매립장에서 돌아오며 들었던 생각은 내가 어려울 때 미국의 대학생이 도와줬는데 이제는 내가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야 하겠다는 일종 보은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생각을 가지고 2007년 몇몇 선배 목사님들과 의논해서 '캠프'를 만든 것입니다.

 

교회 부목사에서 활동가로 옷을 바꾸어 입다

저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크게 4가지의 일을 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고 상도터널 옆에 있는 노량진교회라고 하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큰 교회에서 전임전도사와 부목사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IMF를 맞이했습니다. 1997년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일터를 잃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가장으로서 집에 말을 못하고 출근한다고 나와서 거리에 배회하다가 돌아가고 결국은 노숙자로 전락하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점심 저녁이면 교회를 다니며 식사를 해결하고 약간의 용돈을 얻어서 거리에서 생활했습니다. IMF의 어려움은 전 사회적으로 당면한 것이었기에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너스와 급여를 삭감하고 신규 채용도 중단했습니다. 자녀가 여러 명인 파트타임 전도사님들이 풀타임 자리를 찾기 힘든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저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적으로 힘들어진 사람을 누군가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제가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는 후배에게 기회가 되겠구나 하고 아내와 상의를 한 후 사임을 하고 교회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이후 노숙자와 일시적으로 협력을 하다가 당시 사회적 문제였던 외국인 근로자와 관련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컴퓨터를 만지는 기술이 좀 있었고 교회에서도 관련 일을 해왔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가 어렵게 일하고 번 돈으로 가족과 국제전화를 하는 것에 큰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을 알고 해결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외국인 근로자 인터넷방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대상 국가는 몽골이어서 광장동의 한 외국인센터에서 몽골 외국인 근로자들의 영상편지를 찍고 매월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들어가 협력 센터에서 영상편지를 상영했습니다. 그 후에는 그 가족들의 집에 가서 사는 모습과 함께 가족들의 영상 편지를 찍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서버에 올려서 영상서비스를 했습니다. 힘들게 일하고 밤에 피시방에 들어가 영상 편지를 보며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비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말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이 매체는 몽골에서도 많이 알려지고 국영, 시영 방송과 프로그램을 교류하는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해 4월 20일, 종로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장애인들의 시위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이동권 시위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장애인과 외국인 근로자는 이동의 한계가 유사하고 이것을 인터넷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거기에서 장애인 인터넷신문 위드뉴스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진 가장 왼쪽)이철용 대표.
▲(사진 가장 왼쪽)이철용 대표.

작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미국 세이비어 교회와의 만남

그러던 와중에 2007년 하순부터 1년간 아내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방문연구원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건강 회복을 위해서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기에 사업은 현지 책임자에게 맡기고 필요한 운영자금을 한국에서 조달하기로 하고 저는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워싱턴으로 1년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매일 서버를 살피며 기사를 점검하고 필리핀의 상황들을 모니터링 했습니다.

그 와중에, 워싱턴디시에 있는 작지만 미국을 이끄는 교회인 세이비어라는 교회에 참관인(Observer)으로 매주 수요일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전체 교인이 100여 명인 작은 교회이지만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간 천만 불을 사용하는, 기존 교회와는 다른 사회문제 해결에 특화된 교회였습니다. 자기 교회 건물은 없지만 노숙자들을 위해 아파트를 빌려서 회복시키고 사회로 복귀시키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고아, 폭력, 마약 등 각종 사회문제의 현장에서 회복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합니다. 한 해 동안 이들이 하는 일들을 살펴보며 정말 많은 것들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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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개발협력 NGO 캠프 이철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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