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오딧세이, 애덤 스미스①] 근대 상업사회의 총체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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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오딧세이, 애덤 스미스①] 근대 상업사회의 총체적 이해
  • 2022.06.20 10:00
  • by 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14:53

■ 애덤 스미스라는 사람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오해받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다. 많은 이들은 그가 시장중시와 인간 이기심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한다. 인간 본성의 이기심이 시장 기구를 통해서 인류사회 전체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그래서 독점과 반칙이 난무하는 시장 속에서도 그곳의 강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우상을 높이 쳐들고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한다. 더 많은 자유가 더 많은 이득을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고 그들은 끊임없이 선전한다. 낙수효과의 메시아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시장이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이득을 보는 장소였다. 특권과 독점이 존재하지 않고, 노동을 통한 부단한 노력이 경제적 성공과 인간적 덕성의 증가로 귀결되는 그런 시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귀족과 특권 상인에 대해서 맹렬히 비판했다. 보통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그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 비전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지독히도 불평등하다. 불평등이 불공정한 경쟁을 낳고, 그것이 다시 불평등을 강화한다. 4차산업혁명은 '혁신적'이라는 선전 문구만 떠다닐 뿐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고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자연의 파괴, 팬데믹 등 인류의 생존은 위협받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아주 놀랄 것이다. 그는 이렇게 평평하지 않은 사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후의 천재도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사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에게 아주 많은 지적 유산을 빚지고 있다. 그는 경제학의 아버지다. 경제학의 기본적인 개념들, 즉 상품가치, 자연가격, 명목가격, 이윤, 지대, 임금 등은 처음으로 애덤 스미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근대 상업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그가 했던 작업이었다. 그가 바라봤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꿈꾸었을까? 앞으로 3번에 걸쳐 연재할 내용이다.

▲ 애덤 스미스의 동상.
▲ 애덤 스미스의 동상.

그는 스코틀랜드 커칼디(Kircaldy)에서 태어났다. 18세기의 스코틀랜드는 유럽 지성계의 중심지였다. 1707년 잉글랜드에 합병되어 무너진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은 학문세계를 통해 복구되어 갔다. 애덤 스미스는 선생이었던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 지적 동지였던 흄(David Hume, 1711-1776)과 함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중심을 이루었다.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후 1748년 28세의 나이에 모교 글래스고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12년간 재직했다. 부임 시에는 논리학 담당 교수였으나, 허치슨이 사망한 후 스승의 강좌(도덕철학)를 이어받았다. 이후 대학을 떠나 젊은 버클럭(Buccleuch) 공작의 개인 교사로서 함께 3년간 프랑스를 여행했다. 여행경비 일체와 매년 300파운드의 봉급, 그리고 평생 300파운드의 연금을 매년 지급하는 것으로 글래스고대학 시절 그가 받던 봉급에 2배 가까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는 프랑스와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케네(Francois Quesnay, 1694-1774), 볼테르(Voltaire, 1694-1778) 등과 같은 당시의 유럽 최고의 지식인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케네와의 만남은 『국부론』의 뼈대를 이루는 생각, 즉 부란 금은의 획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서 나온다는 것(중농주의자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교수 혹은 학자로서 무척 성공한 사람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열정적인 강의로 인기가 많았다. 글래스고대학에는 그의 명성에 이끌려 많은 유럽의 부잣집 자제들이 몰려들었다. 36세에 출판한 『도덕감정론』으로 유럽지성계를 강타했으며, 53세 때 출판한 『국부론』은 그 두꺼운 분량에도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어 6개월 만에 품절 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실제로 그의 책은 현실의 풍부한 사례와 창의적인 이론, 정곡을 찌르는 해학과 역사 및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머니와 사촌여동생이 그와 함께 있었다. 몽유병을 앓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약간은 나사가 빠진 성격으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한번은 버클럭 공작부인과 재혼하게 되는 하원의원인 타운센드(Charles Townsend)를 글래스고의 피혁공장으로 안내할 때였다. 자유무역의 가치를 열변하면서 걷다가 그만 고약한 악취가 나는 거대한 웅덩이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만큼 무엇인가 몰두하면 주변에 아무것도 잘 안 보이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의 말년 또한 무척 평온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사회적으로도 무척 존경받았다. 1787년에는 글래스고대학의 명예총장으로 취임했고, 1790년, 67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1723년 스코틀랜드의 커칼디(Kircaldy) 유복자로 탄생.

          아버지는 세관감독원. 어머니는 대지주의 딸

1737-40년 글래스고 대학에서 수학 및 물리학, 도덕철학 수학

1740-46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수학과 그리스로마 고전 수학

1748-51년 모교인 글래스고 대학 교수로 취임.

1759도덕감정론초판 출판. 전 유럽에서의 명성을 얻음.

1764-66년 글래스고 대학을 사직. 버클럭 공작 장남의 개인교사로서 프랑스 여행.

1776국부론출판

1777년 에든버러 세관위원으로 취임

1790년 사망

 

■ 애덤 스미스의 작업

애덤 스미스는 평생 주요한 책 2권을 남겼다. 1759년에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박세일・민경국 공역, 비봉출판사, 2009)을, 1776년에는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3)을 출판했다. 그리고 평생 이 책들을 각각 5차례에 걸쳐 수정 보완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참으로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근대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법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근대사회는 신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법칙이 중심이 되는 사회였다. 애덤 스미스에게 있어서 신은 사랑과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그런 하느님(人格神, Deism)이 아니었다. 우리 생활에 세세히 개입하지도 않으셨으며, 그저 공기처럼 존재하며 자연법칙으로 나를 인도하는 그러한 하느님이었다(理神論, Theism). 이것은 마치 시계 장인이 시계를 만들었으나 그 시계는 정해진 방식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는 원리와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당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의 필생의 작업계획은 글래스고대학에서의 도덕철학 강의내용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그는 신학, 윤리학, 경제학, 법학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근대 이해를 시도했다. 그의 강의는 크게 4분야로 이루어졌었다고 전해진다. ①자연신학(Natural Theology), ②윤리학(Ethics), ③법학(Jurisprudence), ④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 그것이다. 자연신학은 근대적인 이신론, 즉 법칙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며, 윤리학의 대상은 인간 마음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심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후일 『도덕감정론』으로 출판되었다. 『도덕감정론』에서 도출된 인류의 정의와 번영의 법칙을 구체화 시켜 갈 수 있는 정책과 법이 바로 『국부론』과 『법학』의 주요 내용이었다. 

『국부론』의 목적은 "국민과 국가 모두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한 경제정책과 조세정책이 주요 분석 대상이었다. 스미스는 한평생 『국부론』을 고치고 또 고쳐가며 완성해 갔다. 그러나 『법학』은 완성할 수 없었다. 법학 관련의 초고는 있었으나 그는 죽기 직전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친구를 통해 모두 불태워버렸다. 다행히 100여 년이 지난 후에 1859년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집의 책장에서 그의 강의를 받아적은 학생의 강의 노트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현재 『법학강의록』(Lectures on Jurisprudence)의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애덤 스미스가 만년에 쓴 『도덕감정론』의 제5판 첫머리에서 『법학』을 끝내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책의 첫판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정의(正義)와 관련된 것, 경찰(警察), 세입(歲入) 그리고 군비(軍備) 등과 같이 법(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런 것들과 관련된 법과 국가의 일반원리와 이 원리가 서로 다른 시대와 시기에 겪었던 변혁을 또 다른 논문(論文)에서 설명해야겠다고 말했다. 『국부론』에서 나는 이 약속 중 일부를 수행했다. 나머지 것, 내가 오랫동안 계획했던 법학(法學)에 관한 약속을, 지금까지 이 책을 수정하지 못하게 하였던 동일한 여러 가지 일거리들 때문에,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내가 늙어 만족스럽게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아직까지 이 계획을 전부 포기하지는 않았고,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계속 갖고 싶기 때문에, 내가 선언했던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때인 30년 전에 썼던 것보다 더 길어진 그 문구(文句)를 그대로 남겨 두기로 마음먹었다." 

 

■ 애덤 스미스가 제기한 문제

우리는 왜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생각할까? 그가 살던 시기는 거대한 전환기였다.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고, 농촌의 공동체가 파괴되어 갔다. 도시가 팽창하며, 새로운 정치와 사회질서가 탄생하는 등 '용광로'와 같은 전환의 시대였다. 옆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기요틴의 시퍼런 날 위에 구체제가 일거에 붕괴했다. 바다 건너 식민지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을 거쳐 미래 거대한 신흥제국이 형성을 준비했다.

이러한 전환기에 안정된 경제적 번영과 인간적 덕성은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애덤 스미스가 해명해야 할 시대적 과제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애덤 스미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첫째는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 발전으로 인간사회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 '이기심'만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자기 일처럼 느끼는 공감(sympathy)이 존재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공감과 함께 스미스가 강조한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은 바로 양심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공정히 바라보는 '공평한 구경꾼(impartial spectator)'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공감과 양심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 스미스의 경제학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만을 다루지 않았다. 인간 본성과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정신적인 풍요로움 또한 강조했다. 우리는 물질적 충족만으로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배부른 돼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신적인 안락만을 추구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 또한 스미스가 원한 인간 유형이 아니었다. 도덕감정과 경제적 부가 함께 성장하는 미래, 그것이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과제였다.

둘째는 공정한 시장에 대한 강조이다. 사유재산권에 입각한 시장 기구는 인류사회 번영의 중요한 기반인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의 스스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행위(self-love)는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며, 그것을 무시하고는 인류의 번영을 이룩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누차 강조했듯이 스미스에게 있어서 시장이란 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공간이었다. 타인의 정당한 노력을 해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그러한 시장이다. 그는 타인에 대한 동감도 없는 곳, 거래를 위한 정의(룰)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세상을 '아버지 없는 세상(fatherless world)'이라고 불렀다. 지옥인 것이다. 그런 지옥을 그가 원했을 리가 없다. 애덤 스미스는 여전히 공정한 시장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최고의 선생이다.

셋째, 보통사람(중하류층)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는 것이 경제발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상정했던 국가의 번영이란, 국민이 평균적인 부를 증가만이 아니라, 최하층 노동자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지주와 자본가 세력에 대해 상당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미스의 눈에 지주계급은 불로소득으로 빈둥거리는 계층으로 보였다. 자본가(상인과 공장주)들도 상류계급이 되고 싶은 야심을 가진, 공익보다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만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들이 제안하는 그 어떠한 정책도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이익이 결코 정확히 공공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계급, 그리고 사회를 기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며, 따라서 수많은 기회에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으로부터 나온 제안이기 때문이다." (『국부론』 323쪽).

이에 반해 노동자의 이득은 사회의 이익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뿐더러 그들의 목소리도 항상 무시당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정부의 정책적 논의에서 노동자의 목소리는 거의 경청되지 않으며 별로 존중되지도 않는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분업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으나, 분업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비인격화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염려를 했다. 스미스가 특히 일반 노동자들의 교육을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넷째, 개혁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스미스는 개혁가의 조급성을 무척이나 염려했다. 그는 국부론속에서 중상주의와 식민지경영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거듭하고 있으나, 그 개혁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옳은 정책이라도 너무 급속한 실행은 "이해관계자들의 손실과 반발"을 가져와 결국 개혁의 실패로 귀결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폭력에 호소하는 개혁을 철저히 배격했다. 그리고 개혁에 대한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을 스미스는 '한 체제에 매몰된 사람(man of system)'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매우 총명한 자로 생각하기 쉽고", "자기의 계획에 반대될 수도 있는 강력한 편견(偏見)들이나 커다란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계획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게 되는데, 이러한 개혁과정에서의 갈등으로 "인간사회는 언제나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다(도덕감정론, 443-444). 개혁가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미스에게 있어서 행복의 의미이다. 그는 행복이란 '마음의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빚이 없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도덕감정론81). 경제적 윤택함과 신체적 건강과 올바른 사회적 관계망이 잘 형성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악덕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과 재능으로 윤택함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덕성이 증가되고 상호동감에 의한 따뜻한 관계망이 형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였던 스미스 이후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동감에 입각한 정의는 무너지고 약육강식의 세계가 일반적이었다. 시장은 독점과 편법이 판치고, 노동자의 삶은 피폐해 갔다. 일부 자본가들의 탐욕과 낭비가 난무하면서도 그들에게 경제적 부는 더욱 집중되어갔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애덤 스미스를 강조해야 한다. 동감에 기반 한 경제, 정의에 입각한 경쟁, 엄격한 법치, 특권의 타파, 상호이익의 확보 등 스미스가 실현하고자 했던 당()시대의 과제는 25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통()시대적 과제이다.

 

[애덤 스미스] 목차

제1회 : 근대 상업사회의 총체적 이해
제2회 : 도덕감정론의 세계
제3회 : 국부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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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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