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오딧세이, 애덤 스미스②] 도덕감정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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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오딧세이, 애덤 스미스②] 도덕감정론의 세계
  • 2022.07.20 08:00
  • by 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인간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규명을 위해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은 평생을 바쳤다. 애덤 스미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질서와 번영의 원리를 알고 싶었다. 스미스 생각의 출발점은 인간행동의 기반에는 인간 특유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박세일/민경국 번역본, 비봉출판사, 이하 동일) 속에는 인간의 기쁨, 분노, 비탄, 혐오, 분개, 질투, 동정, 친절, 감사, 절제, 미덕 등의 각종 감정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하나씩 따라가며 읽다 보면 타인과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는 스미스의 명민함에 크게 감탄하게 된다. 불과 36살에 쓰고 평생을 걸쳐 수정한 이 책에는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자기성찰의 힘이 넘쳐난다. 통계 숫자와 방정식의 세계에 갇혀 사람에 대한 애정과 동감 능력을 잃어버린 많은 경제학자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시장의 효율성'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진 차가운 시장주의자들이 스미스를 원조로 삼고 있는 것에 가장 한탄할 사람은 아마도 스미스 자신일 것이다.
 

1. 인간행동의 기초(1) : 동감

스미스는 인간이 타인에 대해 동감하며, 타인으로부터의 동감을 기대하기도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자신이 기쁠 때는 타인의 감탄을 원하며, 슬플 때는 타인의 위로를 갈구한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우리는 동감을 표현한다. 이러한 동감(sympathy)은 인간의 기본 속성이다. 물론 도덕적이며 인자한 사람에게는 동감 능력이 더욱 많이 존재하겠으나, 이러한 속성은 단지 그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동감'은 심지어 '무도한 폭도와 가장 냉혹한 범죄자들'에게서도 일부 발견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속성이다. 그래서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 selfish)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天性: principles)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憐閔: pity)과 동정심(同情心: Compassion)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도덕감정론, 3쪽)  

스미스에게 중요한 것은 철저한 도덕적 신념에 따른 인간의 행동이 아니었다. 스미스는 플라톤(Plato 기원전 428-424)식의 철인을 요구하지 않았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식의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은 고정 불변한 이성의 작용 또한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지극히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적정선이었다. 비록 그 수준이 '절대적인 완미로부터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적정선만 유지한다면 충분히 갈채를 받을 만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도덕의 기준, 즉 인간행동의 기준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또는 다른 사람의 동감의 정도(程度)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상대방과 동감할까? 적절한 동감의 정도는 무엇일까? 상대방의 분노와 슬픔에 우리는 다 동의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대방과 어느 정도 감정을 공유할까?  
상대방에 동감하는 첫 번째 방식은 나의 행동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소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방의 감정 정도에 전적으로 동감할 방법은 없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방 또한 나에 대해서 마찬가지다. 우리는 많은 관계(사회생활)를 통해 적절한 동감의 정도를 찾아낸다. 

친구의 부모가 죽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당연히 우리는 친구의 슬픔에 동감하고, 함께 슬퍼해 준다. 그러나 그 슬픔이 친구만큼 일리는 없다. 친구보다 더 슬퍼하면 오히려 그것은 정상적이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내가 불행을 당한다면 친구 또한 함께 슬퍼해 줄 것으로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나의 슬픔을 너무 과도하게 표현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친구가 내 슬픔에 전적으로 다 동감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대방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대한 표현이 너무나 과도하거나 부적절하다면 우리는 일말의 혐오감을 느끼며, 그 행동이 잘 절제되고 합당한 이유를 가진다면 함께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래서 무절제한 감정 표현은 사람에게 동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죽음을 생각해 보자. 만약 소크라테스가 독배 앞에서 한탄하며 울부짖는다면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친구와 제자들은 오히려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만큼 죽음의 비탄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배를 마실 때의 소크라테스의 밝고 쾌활한 평정은 참석한 모두에게 동정심을 일으키며 모두의 슬픔을 더욱 크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2. 인간행동의 기초(2): 양심

우리는 수많은 동감의 상호과정을 통해 행동의 가장 바람직한 정도를 찾아낸다. 단순한 내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상대방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제3장의 입장, 즉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끼게 되는 행동의 적정성의 판단기준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스미스는 그 존재를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고 불렀다. 
우리의 슬픔을 절제하여 전달하는 것도, 그리고 타인의 불행을 전적으로 무시하지 않으려는 것도 우리 마음속의 관찰자가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도덕감정론, 253쪽) 

이것을 양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양심의 작용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크게 작동된다. 가족의 아픔이 타인의 아픔보다 크고, 동포의 불행이 먼 나라 사람들의 불행보다 더욱 크게 느껴진다. 

스미스는 중국(中國)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고 말한다. 대부분의 유럽의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들은 그 불행에 대한 강한 비애를 표명할 것이나 그 이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고 편안한 저녁을 보낼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그가 이렇게 밤을 보낼 수는 없다.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이다. (도덕감정론, 251-52쪽)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기준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러시아에서라면 높은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예의 바른 태도도 프랑스의 궁정에서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태도로 간주되며, 폴란드의 귀족들 사이에서의 절약의 삶도 암스테르담 시민들에게는 거대한 낭비(浪費)의 삶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도적감정론, 385쪽) 

따라서 양심의 판단기준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사회 속에서 형성되고 사회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었다. 한 사회 혹은 시대 속에 타인과의 수많은 상호 동감의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내 내면에 형성된 것이다. 
 

3. 한 사회의 질서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정의와 자혜

인간의 행동은 무척 모순적이나 그래도 공통되는 행동 규칙은 존재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공정한 관찰자'를 가진다면 한 사회의 질서는 사라진다. 스미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과의 반복적인 관계 속에 당연히 지켜야 할 일반적인 규칙들(general rules), 즉 일종의 의무감(sense of duty)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 일반적인 규칙들이 바로 '정의(justice)'라고 표현된다. 

그런 면에서 스미스의 '정의'는 사회 안전 유지를 위한 엄격한 법적 기준을 가진 것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기준에 대한 설명 또한 스미스는 인간의 공감력으로부터 출발한다. 정의를 실현하려는 힘은 해로운 일을 당한 이의 '분노'에 대한 우리의 공감이다. 그 분노라는 감정에 대한 우리의 혐오가 정의라는 형태로 구체화 되는 것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재산과 생명, 명예를 손상하지 않는 것이다. 유행과 관습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재산과 생명의 안전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원칙이었다. 이것이 정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스미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한 사회의 운용원리는 생명과 재산의 보호라는 '정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자혜(beneficience)의 행위 또한 중요하다. 자혜의 행위 또한 인간 본성의 공감력에서 출발된다.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타인의 공감(칭찬), 혹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관찰자로부터의 동감(칭찬)이 타인에 대해 자혜로운 행동을 하는 기반이 된다. 

그러나 스미스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힘은 '자혜'가 아니라 '정의'라고 말한다. 자혜가 많으면 좋은 사회가 된다. 그러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는 비록 덜 행복하고 덜 유쾌할지는 몰라도 와해(瓦解)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사회질서가 파괴되었을 때이다. 사회는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침해(侵害)를 입히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 그래서 스미스는 건물에 비유하며 자혜란 장식품에 불과하나, '정의'는 건물을 유지하는 주요한 기둥이라고 말한다. 불의(不義)의 만연은 사회를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는 것이다.(도덕감정론 162-63쪽)
 

4. 한 사회의 번영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허영과 자기기만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공감력에 기반한 '정의'라면, 한 사회의 번영을 가져오는 힘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그것은 허영(vanity)이며 자기기만(self-deceit)의 힘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 애덤 스미스의 동상.
▲ 애덤 스미스의 동상.

스미스는 이 세상 사람들이 탐욕과 야심, 부와 권력 및 최고를 추구하려는 행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고 물어본다. 분명한 것은 단순한 의식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런 행동의 기반에는 허영이 있다고 본다. 항상 주변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인정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다. 부유함을 추구하는 것은 부유함을 모두 부러워하며, 그 부러움이 자신의 가슴을 벅차게 하고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와 반대로 가난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치욕을 느끼게 한다. 가난한 자란 '군중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오두막집에 갇혀 있을 때처럼' 무시당하며 외로움 속에 사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반문한다. 그것은 그의 재능과 덕스러운 행동, 해박한 지식, 영웅적 용기 등의 요소가 아니라 그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고, 따라서 여러 군주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를 점하였기 때문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경쟁하는 이유는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인정받는 즐거움, 즉 허영 때문이다.

인간은 남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2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지혜를 배우고 도덕을 실천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부와 권세를 획득하는 길이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대중은 부와 권세를 추구한다. 때로는 부와 권세가 덧없는 것이라는 내면(공정한 관찰자)의 소리가 들릴지라도 그는 자기기만을 통해서 그 소리를 왜곡한다. 비록 자신의 부와 권세가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되었을지라도 일단 그것을 취득만 한다면 많은 사람은 자신에게 존경심을 표명하고, 부정한 행위였다는 사실조차도 숨겨질 것이라고 그는 생각(자기기만)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허영과 자기기만이 결국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생각이다. 그들의 탐욕과 허영은 경제적 부를 축적 시키며, 결국은 사회 전체적으로 부가 배분되어 간다. 여기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표현이 나오나, 허영에 의해 축적된 부는 소비행위 혹은 고용행위를 통해서 타인에게 부를 배분된다. 허영과 자기기만은 무의식(無意識) 중에, 부지불각(不知不覺) 중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 번식(繁殖)의 수단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도덕감정론, 345-46쪽)

그래서 스미스는 "천성(天性)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기만(欺滿)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근면성을 일깨워주고 일을 하게 만든 것, 도시와 국가를 건설하게 하고, 과학과 기술을 발명·개량하게 한 것은 모두 이러한 허영과 자기기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허영과 자기기만은, 지구의 전 표면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자연 그대로의 거친 삼림을 쾌적하고 비옥한 평원으로 바꾸었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쓸모없는 대양(大洋)을 새로운 식량자원으로 만들었고, 또한 지상의 다양한 국민들 사이의 교류를 위한 큰 대로(大路)로 만들었다. 토지(土地)는 이러한 인류의 노동에 의해 그 자연적 비옥도(肥沃度)가 배가(倍加)되었고, 훨씬 더 많은 인구(人口)를 먹여 살리게끔 되었다."(도덕감정론 344쪽) 

 

5. 경제성장과 인간 덕성의 조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국부론의 과제

위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스미스의 이야기는 반만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의 진짜 강점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제 스미스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물어본다. 허영과 자기기만으로 인간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인간 내면의 양심의 소리는 자기기만보다 사람의 행복에 더욱 영향을 미친다고 스미스는 강조한다.

그러면 어떠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일까? 첫째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난 최소한의 부는 인간 행복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그런 면에서 스미스는 스토아 철학자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의 엄격한 생활 태도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사람들의 일상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을 말한다. 이때 강조되는 것이 경제적 안정이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욕구는 인간 감정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데, 가난이란 타인으로부터 가장 무시당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스미스는 부의 취득 방식이 인간의 덕성의 증진과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허영과 자기기만에 의한 경제성장이 아니라, 인간 덕성의 증가와 경제가 동반성장 하는 그러한 사회를 희망했다. 즉 인간 내면의 양심의 소리가 작동되는 경제이다. 그가 당시의 경제 시스템, 그가 중상주의(重商主義)라고 명명하며 극도로 비판했던 이유도, 그러한 특권경제가 인간덕성의 증가에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상류사회의 부와 권력의 취득 방법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궁정(宮廷) 안에서,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성공과 승진은 총명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진 동료들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지하고도 뻔뻔하고 오만한 윗사람들의 변덕스럽고 어리석은 호감(好感)에 의해 결정된다. 그곳에서는 공로(功勞)와 실력은 항상 아첨과 거짓말로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능력에 압도당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아첨하는 능력이 일을 처리하는 실력보다 더욱 중시된다."

그의 눈에는 상류계층과는 달리 당시의 부르주아 중류계층의 출세는 지극히 정직함으로 승부를 건 것으로 보였다. 그는 "모든 중류 및 하류 계층의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에서 진실하고 견실한 직업적 능력(能力)을 가진 사람이 신중하고 정직하며 꿋꿋하고 절제(節制)하는 경우, 그가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단언한다. 스스로의 정직함, 절제함을 더해 나가가는 과정, 즉 개개인의 덕성이 증가하는 과정이 부의 축적과정인 것이다.(도덕감정론 112-13쪽)

그렇다면 이제부터 스미스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명확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덕성과 경제적 부가 같이 증진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국가의 구성 원리는 무엇인가? 귀족의 특권을 이용한 부의 축적방식은 덕성과는 거리가 멀다. 보통 사람이 덕성과 윤택함을 함께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제가 필요한가? 『국부론』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애덤 스미스] 목차

제1회 : 근대 상업사회의 총체적 이해
제2회 : 도덕감정론의 세계
제3회 : 국부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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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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