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in 한국] 맑스 소외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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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in 한국] 맑스 소외론의 의미
  • 2024.02.13 10:00
  • by 이홍균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장

「경제철학수고」는 말 그대로 '수고'다. 책으로 출판되지 않은 원고 수준의 글이다. 그래서 서로 충돌하는 내용이 있기도 하고, 서로 중복되는 내용도 발견된다. 아직 출판하기 위해 다듬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글, 완성되지 않은 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의 다른 책들에 비해서 그렇게 길지도 않은,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해 논리정연하지도 않은, 이 미완의 '수고'가 발견되고 출판되면서 맑스를 재해석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맑스 해석을 둘러싼 매우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경제철학수고」는 1932년에 출판된다. 맑스(1818-1883) 나이 26세인 1844년에 쓴 글이 88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맑스 사후 49년 만에 맑스의 글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나마 모스크바의 한 도서관에서 1920년대의 어느 해에 사서가 발견하지 못하였더라면 영원히 묻혀있었을 수도 있었다.

이 수고가 출판되면서 맑스는 인본주의자였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맑스 전체 저작을 다시 새롭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된다. 물론 「경제철학수고」 이외의 저서에서도 소외의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고, 1857년 그의 저서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철학수고」가 출판될 때까지 '소외Entfremdung'는 맑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 대신 자본주의는 스스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붕괴한다는 주장, 잉여율이 하락하여 붕괴한다는 주장이 주류였다. 

생산력이 계속 증가하는데 생산력을 증가하지 못하도록 생산관계, 곧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막고 있기는 하지만 생산력 발전을 생산관계가 더 이상 막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때문에 '봉건제'가 무너졌다는 설명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있는데 이 생산력이 더 증가하지 못하도록 봉건영주와 농노 사이의 관계, 봉건제적 생산관계가 이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생산력 발전이 계속 발전하자 봉건제적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더 이상 가로막지 못하고 결국 봉건제적 생산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맑스는 이 설득력을 이용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모순의 공식을 자본주의에 적용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생산력이 계속 발전하려고 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 발전이 지속되면 더 이상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지 못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주의로 넘어가게 되고 생산력 발전이 자본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대화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맑스 주장이 있다. 그의 마지막 저작이자 가장 유명한 저서인 「자본론」에서 그는 잉여율 하락에 의해서 자본주의가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소한의 이윤을 보면서 더 싼 가격으로 상품을 시장에 내놓는 기업들과의 경쟁은 투여한 자본을 잠식시키는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잉여율의 하락이 일어나고 잉여율 하락은 더 이상 자본주의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무너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투여한 자본 대비 점점 더 적은 이윤만을 얻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저가 경쟁과 출혈 경쟁이 심해지면서 자본 잠식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상품이 상품에 투여한 비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상품에 투여한 비용보다 낮은 가격에 팔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들은 투여한 자본 대비 점점 더 적은 이윤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철학수고」에 등장하는 소외Entfremdung론은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 붕괴하게 된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경제철학수고」의 주된 내용은 낯선 힘에 의해서 노동자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낯선 힘에 의해서 자신의 노동 과정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결정된 노동 과정을 따라야 하고, 자신의 노동 결과물이 노동자와 대립하고 노동자를 지배하고 되고,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는 다음의 이유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맑스는 설명한다. 노동자의 노동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기 때문이고, 노동이 자신의 의지와 의식에 따른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고, 자기 노동자의 노동이 자신의 의식과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외가 일어나는 원인은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산수단을 노동자가 가지고 있다면 소외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경제철학수고」에서 맑스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는 하다. 그러나 생산수단과 직접 노동자의 분리라는 이유를 대입하면 맑스의 노동의 소외, 노동자의 소외가 일어나는 원인이 명쾌하게 이해된다. 

그렇다면 소외가 생산수단과 직접 생산자의 분리에서 발생하였다면 소외는 생산수단과 직접 생산자의 분리를 극복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을 노동자의 것이 되도록 만들면 소외는 극복된다. 물론 이 부분도 「경제철학수고」에서 맑스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내용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모든 맑스의 글이 그렇듯이 맑스의 소외론도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으로 귀결된다. 매우 다양한 이론과 주장들이 귀결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 혁명이다. 사회주의로의 전환이다. 사적유물론도 그렇고, 노동가치설도 그렇고, 잉여율 하락도 그렇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도 그렇고, 그리고 소외론 등도 그렇다.

맑스의 다양한 이론들은 모두 사회주의로의 전환이라는 하나의 귀결로 이어지지만, 바로 그 서로 내용이 다른 이론들 때문에 맑스의 이해를 둘러싼 매우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서로 자신들의 맑스 해석이 가장 정통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해석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논쟁을 벌인다. 그냥 치열한 논쟁에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혁명 과정 중에는 자신과 다른 해석을 하는 상대방을 처단하기도 했다. 

늦게 발견된 맑스 소외론은 맑스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 뜨거운 기름을 붓는다. 발견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성 상실에 대해 맑스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실에 의해 맑스는 전체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역사발전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주장이 대두하면서 맑스는 인본주의자였던 초기 맑스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가였던 후기 맑스로 나누어진다. 초기 맑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맑스를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가와 후기 맑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맑스를 해석하여야 한다는 이론가로 나뉘어지고, 이 두 이론가들은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맑스를 인본주의적 이론가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이론가는 게오르그 루카치이고, 루이 알뛰세는 맑스를 실증주의 과학자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이론가이다. 후기 맑스의 저작이 아니라 소외론을 중심으로 맑스를 해석하는 루카치에게 노동자의 의식화는 사회주의로의 전환에 중요한 전제가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알뛰세에게 노동자의 의식화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자본주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아니라 바뀌어야 할 현실이다. 맑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라, 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매우 강력하게 하고 있다. 그는 이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는 국민경제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맹비난하고, 그리고 철학자들을 맹비난한다. 국민경제학자는 현실을 바꾸려고는 생각하지 않고 현실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철학은 그동안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한다. 

혁명의 불가피성은 맑스의 모든 글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그의 글 곳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는 혁명의 불가피성을 논증한다.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비판하고 그 자리에 세상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이론을 위치시킨다. 맑스의 모든 글에는 혁명의 불가피성이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맑스의 이론은 현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이론이다. 매우 강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매우 본질적인 이상 추구를 바탕으로 세상을 인정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부정하고 그 세상을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논증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이 아무런 의문 없이 맑스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또는 맑스의 이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나중에는 혁명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는 맑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맑스처럼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독자들이라면, 맑스가 제기하는 인간성 상실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극복을 위해서는 사회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맑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맑스의 생존 당시의 독일, 프랑스, 영국의 노동자들은 매우 처참한 상태였다. 그 반면에 자본가들은 봉건사회의 귀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치를 즐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맑스는 차가운 지식인들의 머리를 정의감으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맑스만큼 전 세계를 변화시킨 사상가는 없다. 전 세계의 거의 절반이 맑스의 사상에 따라 사회주의였던 시기가 있었고, 사회주의로 넘어가지 않은 나라들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세력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도 북한과 쿠바,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등 일부 국가는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로 남아있다.

1970년대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맑시스트였다. '맑스를 모르면 지식인 대열에 끼기 어려웠던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국과 프랑스, 독일을 포함한 유럽과 러시아, 일본, 미국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지식인과 사상가가 맑시스트였다. 

그러나 그 많은 맑시스트들 가운데 맑스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맑스 이론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맑스 이론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많았지만, 그러나 맑스 이론의 문제점을 정확히 비판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던 것 아닌가 질문이 필요하다. 
몇 가지 맑스 소외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1. 「경제철학수고」에서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을 하면 할수록 빈곤해진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맑스가 살던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은 오르지 않았고 그 임금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노동자의 공급이 노동자의 수요를 훨씬 넘었기 때문이다. 싼 임금으로도 얼마든지 일하려는 노동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윤이 남았더라도 임금을 올려주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그 당시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싼 임금으로도 일하려는 노동자가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 임금이 오르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하지 않아야 노동자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이 보다 힘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맑스는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을 언급하게 되면 자신이 설정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노동자의 초과 공급이라는 전혀 생소한 사실에 주목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2. 맑스 소외론은 맑스의 다른 이론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다른 이론들에 의해서 지원되고 있다. 노동가치설과 사적 유물론이 그 이론들이다. 소외론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본가를 위해 생산하고 자신의 노동의 결과에 의해서 지배된다.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이고 역사의 주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이다.

그러나 노동가치설에서 맑스는 노동자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적 유물론에서 노동자의 노동만이 역사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노동가치설과 사적 유물론은 소외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아닌 세상에서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으로, 그리고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아닌 세상에서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인 세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맑스의 소외론, 노동가치설과 사적 유물론을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먼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가치설의 원조는 국민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기는 하지만 맑스는 그 노동가치설을 혁명이 필요한 이유에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맑스에게 던지는 질문은 과연 생산수단을 노동자가 소유하게 되면 노동자의 소외가 다 사라질까? 과연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하고 그래서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는 것일까? 과연 역사를 만드는 것은 노동자이고 그래서 역사의 주인이 노동자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는 것일까? 

3. 「경제철학수고」가 발견되고 출판된 이후, 많은 맑시스트들은 소외론을 맑스 이론의 새로운 단초라고 주장하고 실제로 소외론으로 맑스의 전 저작을 다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다. 인간성의 상실, 비인간화에 맑스의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정작 맑스 자신은 소외론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출판하지 않고 수고의 상태로 남겨두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소외론을 포기하였다면 왜 포기하였을까. 왜 인본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고 점점 더 다른 시각으로 자본주의가 붕괴하게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노동자가 자신이 소외되어 있는 상태를 깨닫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있는 그대로의 노동자의 상태, 소외되어 있는 상태를 의식화하게 되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고 그 처지를 바꾸기 위해 단결하리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주장이라는 것을 맑스는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르다. 

맑스는 아마도 소외된 상태를 의식하는 의식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의식화가 일어나서 그 의식화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문을 던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소외'와 '소외의 극복'이라는 문제 제기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소외론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4. 맑스는 혁명의 필요성, 혁명이 필연성은 도처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강조하지만, 실제로 혁명이 어떻게 일어나야 할 것인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할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그렇게 열정적으로 만들려고 하였던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인 세상을 어떻게 만들고 그 세상은 어떻게 운영될 수 있는지,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맑스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한 사회라고 하고 그래서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사용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목축하고 식사 후에는 비평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막상 사회주의 사회는 맑스가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는 어떠한 사회주의 사회도 예외없이 그야말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전체주의 사회였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생필품조차도 제대로 조달되지 않는 그러한 사회였다. 

노동자의 천국이 아니라 노동자의 지옥인 사회였다. 그러나 공산당에서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에 맑스 주장처럼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은 반동분자(reactionary)로 몰아붙여 처형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맑스가 살던 시기 노동자는 처참하게 살고 있었고 자본가는 지나친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맑스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었을 것이고 바뀌어야만 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글을 썼고 남겼다. 

특히 헤겔과 포이에르바하,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등의 이론을 섭렵하고 그 글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있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에 맞추어 엄청난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 자체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고, 그의 사상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로 만들었다. 그는 선한 의지로 노동자를 위한 세상을 꿈꾸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이론에 따라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 사회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선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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